If I die tomorrow. 미리 쓰는 유서

[도서]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유성호

by 샘바리
하도 TV로 많이 봐서 길거리에서 만나면 반가워서 인사드릴 것 같다. (출처 : SBS 그것이 알고싶다)


나는 '죽어야 만날 수 있는 남자' 유성호 법의학자를 매주 TV에서 만난다.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을 탐사 보도하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애청자기 때문이다. 그의 날카롭고 전문적인 분석은 미궁에 빠진 기이한 미제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게다가 '죽음'이라는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다룬 그의 책을 읽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성호 법의학자는 마주하는 자가 항상 죽은 자이다 보니 환자에게 존경을 받거나 경제적 부를 모을 순 없지만, 소박하지만 은은히 빛나는 중이다. CSI 과학 수사대처럼 미제 사건의 뒷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펼쳤지만, 읽을수록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을 권리와 살릴 의무는?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마주했다. 죽음의 역사적 맥락, 인식의 변화 등도 자극적인 살인 사건보다 오히려 흥미로운 주제였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생의 마지막 단계이자 자연스러운 섭리입니다. 죽음을 배움으로써 삶에 대한 소중한을 느끼고 주변을 돌이켜볼 수 있는 교양인으로서의 품격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서울대 강좌 개설 신청에 대한 질의 중


굿바이. (출처 : Jan Tinneberg / Unsplash)


보험금을 노린 가족 살인, 치정으로 얼룩진 우발적 살인, 군대 내 구타, 가혹행위로 벌어진 사고사. 불완전한 인간의 다양한 범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억울한 죽음이 조금씩 줄어들 뿐이다. 시신을 부검하고, 감정하고, 법정에서 진술하고.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반복된 경험은 무척 차갑지만 범인 색출, 유무 판정, 형량 정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유성호 법의학자의 자료 기반 분석은 자칫 경찰, 검찰이 놓칠 수 있는 수사의 허점을 채워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대수롭지 않고 담담하게 우스갯소리를 섞어서 그의 일을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개인의 불행, 나아가 사회적 불행의 반복을 막는 꽤나 사명감 넘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변천사', '자연사/외인사/불상 등 사망의 종류', '연명 의료' 등 다양한 설명과 Q&A 파트는 실제 대학교 강의를 듣는듯한 느낌도 들었다.


"국가적으로도 자살 방지 정책을 시행하는 데 일정 정도의 예산을 들이는 것을 당연시해야 한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자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안타까운 죽음이 줄어들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리하여 시신을 부검해야 하는 법의학자로서 꽃피는 봄이 오면 꽃보다 시신을 더 많이 마주 보는 시간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 자살, 남겨진 자가 해야 할 것들


미운 사람들보다 고마운 사람이 훨씬 많다. (출처 : Kelly Sikkema / Unsplash)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한 부분이었다. 실제 강의였다면 개인 과제로 나올법한 '임종 노트'도 특히 와 닿았다. 삶의 후회를 줄이고, 나아가 남은 이들에게 막연한 슬픔보다 행복한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맞이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빛나고 소중하기 마련이다. 나도 당장 죽음을 떠올리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한 게 사실이다. 눈물, 고통, 상실감, 그리움, 분노. 인간의 감정 단계나 대처법을 책으로 읽었더라도 막상 눈앞에 소중한 이의 죽음을 맞이하면, 나는 가볍게 버텨낼 자신이 없다. 죽음은 비켜갈 수 없기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욱 자주 표현하고, 진정하고 싶은 일, 꿈꾸고 있는 일을 해나가야겠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그리고 자주 해야 한다.
둘째, 죽기 전까지 자신이 진정하고 싶었던 일, 즉 꿈꾸고 있던 일을 해야 한다.
셋째, 내가 살아온 기록을 꼼꼼히 남겨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겨줄 자산이 있어야 한다.
넷째, 자신의 죽음을 처리하는 장례 등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모으기 위해 경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를 바란다.
다섯째, 지금 건강하다면 건강을 소중히 여기고 더욱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Q&A 중



미리 써보는 유서 - 2019.04.27


"죽음이라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매일 아침 지겹게 울리던 알람 소리, 결말이 궁금해 출퇴근 짬짬이 읽던 책, 따뜻한 햇살과 미세먼지를 나란히 맞이하며 걷던 산책길.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낯설게 멀어지네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지만 그게 나의 차례라니 여전히 두렵습니다. 이는 죽음 이후의 시간, 천국과 지옥 같은 공간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모두 사라지고, 그들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밀려오는 슬픔입니다. 벌써 그립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일, 후회되는 순간도 많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흘려보내고 짧은 글로나마 인생을 돌이켜보고, 사랑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겨진 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늘 부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렇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행운이 많이 따르고 고마운 이들이 많았다는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보통의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학교, 직장, 사회에서의 은인들이 없었다면 '보통'조차도 어려웠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실적인 내용도 덧붙입니다.

장례는 화장으로 해주세요. 어차피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존재인데 좁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빌려주거나 빌린 돈은 없으니 복잡한 법적 문제는 없을 겁니다. 마이너스통장은 보험금으로 깨끗해지겠죠.

통장 비밀번호는 XXXX. 온라인 비밀번호는 XXXXXXXX입니다. 칠칠맞은 저와 달리 꼼꼼하고 야무진 아내가 전부 저장했을 테니 크게 걱정 없습니다. 혹시나 비밀번호 못 찾으면 질문은 고향? 답은 마산입니다.

평생 종교는 없었지만, 친구이자 신부인 현직이를 불러주세요. 진지한 기도문과 빵 터지는 농담을 함께 구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깜찍이 소다 먹으려고 성당 성가대 2 달인가 했습니다.

사후 장기 기증은 꼭 해주세요. 평생 사회봉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조금이나마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름 건강하게 관리했으니 태생적으로 약한 호흡기 빼고는 쓸만할 거예요.


그리고 테니스, 축구, 농구 등 온갖 스포츠로 함께 했던 친구들. 실수도 많았지만 나름 폐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던 직장 동료들. 지금까지 읽는 것도 길어서 귀찮았을 수도 있으니 짧게 줄일게요. 번거롭게 장례식장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제가 끄적인 글을 읽는 동안 만이라도 저와 했던 추억을 기억하며 한번 미소라도 지었으면 좋겠어요. 짜증이나 미움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할게요. 당사자와 마주 보고 멱살 잡을 수는 없으니 부디 너그럽게 봐주세요. 제법 재밌게 살다 갑니다. 잘 지내세요 모두들. 사.. 사..라...ㅇ. 아니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동생.

부모님도 부모님이 처음이라 서툴고 힘들었을 텐데, 진심으로 사랑해주시고 헌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늘 말하시곤 했지만, 미울 때도 있었을 텐데.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리란 확신이 있기에 모든 일에 자신 있고 긍정적으로 임할 수 있었어요.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뻔하긴 해도 면접장에서 정말 부모님을 자주 말하곤 했어요. 불완전한 어른일 수는 있지만, 저에게는 완벽한 부모님이셨어요. 아빠는 꼭 담배 끊으시고, 엄마는 건강검진 귀찮아도 절대 빼먹지 마세요. 먼저 떠나는 불효를 저지르지만 이왕 먼저 떠난 거 건강하시라고만 기도하겠습니다. 너무 울지 마세요. 하늘나라에서도 아마 잘 적응하고, 부모님 오래오래 행복한 삶 즐기시라고 응원하고 있을 거예요.


타지에서 고생하는 내 동생. 내가 가장 아끼고, 나와 웃음 코드가 정말 잘 맞고, 대견하면서 부러워하는 거 알지?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토토 미술학원 가기 싫어서 떼쓰는 귀여운 꼬마인데 벌써 어른이 되고, 당차게 독일에서 지내는 걸 보면 신기할 뿐이야. 버릇처럼 말하는 추억들은 정말 잊지 못할 거야. 자전거 타고 간 동양문고에서 책 보다가, 건너편 맥도널드 3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군침이 도네. 늘 건강하고 하고 싶은 일, 가보고 싶은 여행지 만끽하면서 살아! 우리 가족의 활력소이자 비타민 역할에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넌 그냥 존재 자체로도 힘이 되니깐. 그나저나 다 같이 모여 계란찜, 진미채에 그냥 따뜻한 흰쌀밥을 먹고 싶어요. 약간 타야 제맛인 누룽지도 빼먹지 말고요. 아! 델몬트 병에 담겨있던 고소한 보리차도 끓여주세요.


사랑하는 아내.

늘 그랬던 것처럼 고맙고 또 고마워. 평생 살면서 가장 큰 행운은 아마 보정동 카페거리에서 널 처음 만났던 순간에 찾아왔어. 은근히 고집 세고 대놓고 답답한 내 성격을 사실 나는 잘 알아. 하지만 함께 있으면 내가 조금씩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어.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완벽해지고 싶었고. 욕심 없이 보통만 하자는 적당 주의자인 내가 자기와 관련된 일에는 욕심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 항상 놀랐지. 참 많이 배우고,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몰디브, 이탈리아,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등 부지런히 떠났던 여행 사진을 볼 때면 참 행복했어. 조잡한 실력으로 편집한 여행 영상을 돌려보는 게 제법 큰 낙이었는데, 가끔씩 돌려보면서 풋풋한 우리의 알콩달콩한 추억을 기억해줘.


특별했던 모든 순간은 영원히 빛나겠지만, 오히려 사소한 일상이 많이 그리울 것 같아. 아침 출근길에 같이 마셨던 따뜻한 아메리카노, 자기 전에 꽁냥꽁냥 TV를 보면서 나눴던 수다, 긍정 회로를 돌리며 상상했던 여러 미래들. 먼저 떠난 김에 (가능만 하면) 로또 번호 6개 알려주려 달려올게, 대신 잠 설치지 말고 푹 잘 자고 있어. 덜렁거리는 나지만 의외로 꼼꼼한 구석이 있는 나니깐 믿어봐. 요가도 꾸준히 하면서 건강 잘 챙기고, 누군가의 건강을 지킨다는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디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어. 나에게는 최고의 아내이자, 존경하는 사람이었어. '유느님'이라 부른 것도 충분히 하느님 앞에서도 설명할 수 있어. 그만큼 내게는 최고의 선물이었으니깐. 사랑해. 고맙고 또 고마워.


+ 아! 그리고 이렇게 소중한 선물을 제게 주신 처가 식구들. 듬직하면서 귀여운 사위 노릇을 제대로 했나 모르겠네요. 더 살갑게 먼저 연락드리고, 함께 했어야 하는데 아쉬운 마음도 들어요. 늘 소중한 가족으로 맞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해서 처음 인사드릴 때부터 느꼈어요. 아내와 결혼하는 데 있어서 확신을 주신 건 그때 그 화목한 가족 분위기도 제법 큰 요소였어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가득 차려주시는 식사와 유쾌한 웃음을 영원히 기억할게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항상 건강하셔야 해요. 감사합니다.


++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죽음을 생각하면, 당장 맛있는 거 먹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하세요.

저는 최대한 살 수 있으면, 살고 싶어요. 아직 먹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았거든요.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마 피하고 싶은 죽음에 대한 마지막 저항일 겁니다.

저 대신이라도 더 즐겁고 재밌는 일 많이 해보고 나중에, 정말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들려주세요.

남의 이야기를 재밌게 듣는 건 또 잘하거든요. 굿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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