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혼자일 것, 행복할 것, 홍인혜
항상 여행을 떠날 때는 함께 읽을 책을 한 권씩 들고 갔다. 필연적으로 기다림이 꼭 포함된 여행에서 책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잠시 산책을 하고 카페에 들러, 남는 시간을 보내는 가장 큰 동행은 책이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떠나는 여행에는 조금은 가벼운 책을 골랐다. 제목부터 <혼자일 것 행복할 것>. 혼자가 아닌 상황에서 읽는 혼자의 행복이라. 평소 '나 혼자'의 길을 당당히 외치며 살아가는 독립적인 인간이지만 이제는 함께 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기에 나름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혼자일 것 행복할 것>은 카피라이터이자 카투니스트인 홍인혜 작가의 1인 독립가구 이야기다. 처음에는 '낢이 사는 이야기'와 '루나 파크'가 헷갈렸지만, 어느덧 루나의 블로그도 살펴보며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팬이 되었다. 자연스레 새 책도 구매했고 대학 시절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2년여의 자취 생활이 떠올라 기대를 안고 책장을 넘겼다.
혼자가 되자마자 ‘본격 독립생활 시작!’이라는 축포가 팡 터질 줄 알았더니 웬걸, 은하계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됐다. 제 발로 집을 나선 주제에 웃기는 감정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포근해야 할 나의 공간이 실은 지상에서 가장 낯선 공간이었다. 앉아야 할지, 누워야 할지, 어떤 포즈로 있어야 할지도 가늠이 안 됐다. 뭘 해야 할지, 어떤 스케줄로 살아야 할지 정신이 멍했다. 그런데 이 기분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겨울 풀장에 뛰어들며' 중에서
단순히 일기 형식의 글뿐 아니라 깨알 같은 루나의 카툰과 살림살이 추천 등 만화도 담겨있어 반갑고 읽기도 즐거웠다. 게다가 혼잣말 사전에서 선정한 키워드들에 대한 짤막한 단상을 풀어내며 카피라이터의 능력치도 선보였다. '혼술, 혼밥'이 유행처럼 번지며 1인 가구에 대한 환상은 점점 커져가는 게 현실이다. 오롯이 자기만의 공간에서 차별화된 취향으로 꾸미고, 반려묘나 반려견을 키우며 지내는 일상. SNS를 가득 채운 행복한 독립적인 공간은 사실 빙산의 일각이자, 유행처럼 번지는 지향점에 불과했다. 루나는 <혼자일 것 행복할 것>에서 핑크빛 자취가 아닌 반대와 역경, 고비와 불편함을 빼먹지 않고 기록했다. 그녀는 집을 나오겠다는 결심에서부터 반대에 부딪힌다. '대입-졸업-취업-결혼-육아'란 반강제적으로 꾸려놓은 길을 따라가라는 사회는 1인 가구를 탈주자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첫 번째 에세이집 이름처럼) 루나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큰 다짐을 하고 과감하게 집을 나선다.
나의 마음속에 낭만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초여름의 어느 날, 길어진 햇살 속에서 귀가하는 나의 모습. 집에 오자마자 나만의 텔레비전을 켜고 파자마로 갈아입는 나의 모습.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캔맥주를 따고 적시타에 환호하는 나의 모습. 아홉시 뉴스가 시작되어도 채널 독점권을 가질 수 있는 나의 모습. 이 장면이 마음속에 구체화되자, 정말로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 낭만이 구체화됐다.
- '야구와 독립의 상관관계' 중에서
나름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이라 여겼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집을 구하고 나서도 흉흉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자 혼자 사는 티를 내지 않아야 했다. 주변 이웃의 층간소음으로 유발된 싸움에도 마음 졸여야 했으며, 그동안 집안은 엄마의 손길이 엄청나게 뻗쳤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낀다. 때로는 홀로 외롭고, 때로는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에 우울하기도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울타리에서 한 뼘 자란다. 야구 중계와 치맥을 때리는(때린다는 표현만큼 입에 딱 달라붙는 단어도 없다!) 저녁, 타인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차근차근 시를 쓰기도 한다. 게다가 개인 PT까지 신청해 운동도 하며 건강의 중요성도 몸소 느낀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소홀히 하지 않고 진정 원하는 욕망을 찾아가며 삶 전체의 균형을 잡아나가는 과정이 제법 흥미롭다. 무엇보다 자신의 취미를 새롭게 찾아내 흥미를 붙였다는 점은 정말 바람직하고 부러운 일이었다. 단순히 스마트폰에만 빠져 손가락 운동만 하다가 퇴근 후 여가시간을 보내는 회사원이 매우 많은 세태에서 말이다.
애초 덧없는 환상으로 시작된 부동산 탐방이었지만 나는 현실의 냉정한 회초리에 금세 정신을 차렸다. 마음에 차는 집은 영 나타나지 않았다. 위치, 안전, 채광, 단열, 수압, 구조 등등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집은 내 예산 안에 없었다. 사람은 집을 구하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자본주의사회임을 통감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돈의 논리였다. 돈을 더 쓰면 햇빛이 몇 룩스 더 들어오고, 돈을 더 쓰면 집이 몇 평 더 넓고, 돈을 더 쓰면 좀더 역에서 가깝고, 돈을 더 쓰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 '부동산 투어' 중에서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점 나아지는 루나의 독립생활을 보니 지난 대학교 앞 자취방이 생각났다.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좋다고 계약했지만 서서히 안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을 꽤 올라가 으슥한 골목을 지나,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야했다. 깜빡하고 열쇠를 챙기지 않았어도, 담을 타고 넘으면 되는 스마트(?)한 보안 시스템도 갖췄다. 역시 자본주의 세상에서 공짜는 없더라. "아이고, 할머니가 가고, 학생이 왔네.."란 옆집 할머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 세입자는 고향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가셨던 것이었다. '홈 스위트 홈'이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할 골방이었다. 여름철엔 대구 최고 기온을 가볍게 뛰어넘어 선풍기가 무력화되었으며,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 머리를 감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심지어 최악의 경우 쥐가 눈 앞에서 튀어나온 걸 보고 여동생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함께 침대 위에서 벌벌 떨며 잤다. (미키 마우스나 라따뚜이가 아니라 정말 엄청나게 빠른 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여동생과 함께 2년 가까이 버텼는지 참 신기한 지경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겐 외로움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직 스스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자발적인 고독 타임 말이다. 반려자가 있는 사람들조차 이런 혼자만의 시공간이 간절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떠난 빈집에 혼자 남아 있는 독거인의 모습을 무조건 스산하고 가엾고 가슴 찡한 풍경으로 해석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타인들이 응당 있어야 하는 공간에 잉여 분자처럼 혼자 남겨진 것이 아니다. 관계가 결핍된 안타까운 상태도 아니다. 반려자를 찾지 못해 서글퍼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우리의 ‘아무렇지 않음’에 이상한 주석을 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혼자의 삶에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는 원래 혼자가 당연한 세계다.
- '완전한 세계' 중에서
하지만 학교 앞에서 살며 삶의 질이 달라졌고, 나름 동생과 소소한 음식을 해 먹으며 매우 잘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살았나 싶지만 20년 넘게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 아래 자랐던 나에게 충분히 훌륭한 경험이었다. 새삼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반강제로 길러진 독립심이 전세금과 함께 내게 남은 자양분이었다. 이제 다시 새로운 공간을 나만의 취향, 아니 타인의 취향과 절충선을 찾아 꾸밀 시간이다. '다른' 것은 있을지 몰라도 '틀린' 것은 없을 게 분명하다. 온전히 내 편이 되어줄 사람과 독립적인 공간을 함께 꾸밀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배려하고 맞춰가며 작지만 넓은 우리만의 세계가 탄생하길 기대해본다. 물론 실제로 더 넓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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