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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Jun 26. 2019

[U20WC] 자율 속의 규율, '원팀'이 만든 신화

U-20 월드컵 결산


기나긴 2019 FIFA U-20 월드컵이 끝났다. 한국 남자 축구 최초로 피파 주관 결승에 오른 한국은 우승을 코앞에 두고 아쉽게 무너졌다. 과정이 아닌 결과가 중요한 결승전에서 아쉬운 1대 3 패배였다. 이강인이 전반 5분 만에 선제골을 뽑자 너도나도 우승을 기대했지만, 우크라니아는 확실한 강팀이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토너먼트를 치른 한국은 체력적 부담을 이겨내지 못했고, 상대의 빠른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하지만 선수, 코칭스태프, 팬들 모두 분노의 목소리가 아닌 열렬히 박수를 치며 축제를 기억했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대표팀은 끈끈한 팀워크를 자랑하며, '원팀'임을 증명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명승부의 연속이었고, 한국은 물론 세계가 놀란 성과였다. 4승 1무 2패. 단순히 기록만이 아니라 2019 U-20 월드컵 신화는 행복한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한국 축구의 미래가 선보인 신화를 성인 무대에서도 이어가기 위해서는 모두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폴란드 U-2O 월드컵이 거둔 찬란한 성과를 차분히 곱씹어봐야만 하다.


- 확실한 차세대 에이스, 골든볼로 검증된 이강인의 재능


좋은 추억이었고, 좋은 경험이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 이강인(발렌시아CF)


골든볼을 수상하며 대회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강인 (출처 : KFA)


01년생 '막내 형' 이강인(발렌시아CF)은 자신의 재능을 전 세계에 뽐냈다. 1~2살 나이차가 체격적, 체력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는 연령별 대회였지만, 골든볼의 주인공은 에이스 이강인이었다. 18살에 U-20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한 건 왼발잡이 이강인의 우상인 마라도나, 메시뿐이다. 7경기 통틀어 600분 이상 뛰며 꾸준한 경기력, 확실한 공격포인트(2골 4도움)를 선보였기에 예상된 결과였다. 귀여운 슛돌이가 프리메라리가 발렌시아 1군에 데뷔했다는 소식만 들었던 한국 팬들에게도 이강인의 퍼포먼스는 인상적이고 충격적이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안정적인 탈압박, 방향은 기본이고 구질, 궤적, 속도까지 상황에 따라 조절하는 정확한 패스는 단연 돋보였다. 스피드나 체격이 아프리카, 유럽 등 경쟁자들에 비해 다소 부족했지만, 이를 만회할 압도적인 킥력은 한두 수 위였다.


한일전 당시 상대의 거친 압박을 영리한 발재간과 넓은 시야로 공격으로 전환하거나, 세트피스에서 이지솔, 오세훈의 극적인 골로 연결된 정확한 크로스는 백미였다. 4강 에콰도르전에서 나온 기습적인 결승골 어시스트도 순도 높았다. 수비진이 방심한 사이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찔러준 패스는 자신감이 돋보였다. '항상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밝힌 이강인은 발렌시아뿐 아니라 전세계가 주목하고 인정하는 선수가 되었다. A대표팀 감독 벤투도 다양한 포지션 자원으로 주목하고 있으며, 레반테 등 여러 경쟁력 있는 프로팀의 관심도 높아졌다. 임대, 이적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지만, 이강인의 미래는 밝다. 확고한 목표를 지닌 차세대 에이스 이강인은 묵묵히 자신의 재능을 키워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꾸준히 프로 무대 출전 기회를 얻어가며 경험치를 쌓아간다면, 더 높은 무대를 노리는 게 헛된 희망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 초짜 감독? 친구 같은 선생님! 공부하는 지도자 정정용 감독


행복하다.
같이 고생한 부분이 결과로 나타나서 평생에 이런 기억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다.
- 정정용 감독


연령별 대표팀에 구원투수에서 최고의 명장으로 거듭난 정정용 감독 (출처 : FIFA)


국가 대표는커녕 프로 무대 경력도 없는 무명 선수 출신. 대구FC 수석 코치, 현풍고 감독 경력 전부인 초짜 감독. 정정용 감독을 둘러싼 의구심과 불신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정용 감독은 선수들의 전폭적인 존경은 물론, 월드컵 무대에서 준우승으로 당당히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사실 정정용 감독은 과정을 중시한 감독이었다. 오랜 시간 전임 지도자 생활을 하며 성과지향적인 다그침보다 선수 개개인의 성장과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 2016년 U-20, 2017년 U-23팀 감독대행을 맡았을 때도 이승우, 백승호 등 스타플레이어도 잘 활용하며 팀을 이끌었다. 이번 월드컵 전에도 사소취대(捨小取大), 작은 것을 탐하지 말고 더 큰 것을 노려야 한다며 즐기면서 축구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유로움 속의 끈끈함을 바탕으로 선수들의 성장, 준우승이란 결과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수비 불안을 노출하며 따낸 U-20 월드컵 출전권, 강호 포르투갈, 아르헨티나와 묶인 죽음의 조. 정정용 감독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유연한 전술 변화와 확실한 콘셉트를 자랑하는 교체로 객관적 열세의 상황을 뒤집었다. 조별예선 1차전 포르투갈전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전반전을 내줬지만, 후반전에는 엄원상, 오세훈을 투입하며 나쁘지 않은 모습을 선보였다. '선수비 후역습'을 탄탄하게 준비했으며, 이강인을 전진 배치하며 갈수록 나아지는 경기력을 이끌어냈다. 16강 한일전에선 완벽한 전술의 승리였다. 이틀이나 더 쉰 일본을 상대로 무리하게 맞불을 놓기보다는 철저히 전반전 점유율을 내주는 선택을 했다. 압도적인 점유율에도 유효슈팅을 제대로 날리지 못한 일본은 한국의 갑작스러운 후반전 공격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작년부터 준비한 3~4가지 전술을 토너먼트 무대에서 변화무쌍하게 사용하며 극장승을 이끌었고, 이는 늘 공부하고 선수를 믿었던 정정용 감독의 실력이었다. 오랜만에 한국 축구계, 특히 감독 인재풀에 소중한 자원이 나타났다.


- K리그가 길러낸 소중한 스타플레이어, 이제는 실전이다.


정말로 내게는 K리그2 출전 경험이 U-20 월드컵에 엄청나게 도움됐다.
경기 출전 경험이 많다는 것은 중요하다. R리그 출전과는 또 다른 것이다.
- 오세훈(아산무궁화)


팬사인회, 경기 출전에도 지치지 않는 오세훈! (출처 : 아산무궁화)


U-20 월드컵의 주역 K리거 15명은 나란히 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했다. 현대고(울산현대 유스팀) 출신 김현우(디나모 자그레브), 최준(연세대)를 비롯해, 금호고(광주FC 유스팀) 출신 김정민(FC리퍼링) 등도 K리그의 유스 시스템의 산물이다. K리그1, K리그2 팀들은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젓는 심정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실제 팬들 역시 K리그2 안산, 아산 등에 직관을 하며 열띤 환호를 보냈다. (아산 무궁화는 시즌 최다 유료 관중 5,016명 기록을 세웠다. 박동혁 감독 역시 이를 알고 오세훈을 이른 시간에 교체 투입했다.) 사실 U-20 월드컵 선수들은 3주간 7경기나 치르고 귀국 후 청와대 만찬, 기자회견, 환영회 등 고된 일정을 소화했다. 그래도 K리그 스타들은 팬들과 소중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주장 황태현(안산그리너스FC)의 홈경기 팬사인회에는 수백 명이 몰려들었고, 김세윤, 이지솔(대전 시티즌)은 프로야구 시구에도 나섰다.


실제 프로 무대 데뷔에 나선 선수도 있다. 승부차기에서도 맹활약한 이광연(강원FC)은 지난 23일 17라운드 포항전에 전격 선발 출전했다. 비록 전반전에 4골을 허용하며, 프로의 높은 벽에 가로막혔지만 번뜩이는 선방을 선보였다. 게다가 추가시간 3골을 포함해 무려 5골을 터뜨린 강원FC의 극장쇼에 1승의 기쁨도 맛봤다. U-20 월드컵 통산 최다 출전(11경기) 기록을 세운 조영욱 역시 후반 교체되어 가벼운 몸놀림을 보여줬다. 오세훈 역시 후반 이른 시간 교체 투입되어 환호성을 받으며 대전시티즌전 승리에 힘을 보탰다. 이제 U-20 월드컵 준우승을 발판 삼아 단순히 번뜩이는 유망주, 교체 자원이 아니라 진짜 프로 무대에서 통하는 경쟁력을 선보일 시간이다.


- 막무가내 정신력이 아닌 '자율 속의 규율'의 승리


우리나라 선수들은 어릴 때 계속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책임감 가지고 하면 된다.
존중, 자유를 주고 규칙을 위배됐을 때 책임져야 한다.
 - 정정용 감독


최고의 팀워크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회를 마친 대표팀 (출처 : KFA)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선수권은 2002년 월드컵과 더불어 찬란한 '4강 신화'로 기억된다. 카리스마 넘치는 박종환 감독의 리더십은 어린 선수들에게 투지를 이끌어냈고, 실제 한계를 뛰어넘었다. 흔히 말하는 한국 대표팀의 장점인 '정신력', '투지'같은 가치가 중요시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정용 감독이 이끄는 U-20 월드컵 대표팀은 정반대의 분위기로 신화를 써 내려갔다. 훈련장에서 최신곡을 틀고 신나게 운동을 하며, 코칭스태프와도 허물없이 유쾌하게 지냈다. 하나 된 분위기에서 즐겁고 뛰고, 각자의 위치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자율 속의 규율'을 강조하며, 서로를 믿고 프로답게 경기에 나섰다. 예전 같은 (흔히 말하는) 빠따는 더 이상 없었고, 오로지 성과를 내기 위한 무리한 조기 소집도 없이 이뤄낸 대단한 성과다.


이규혁(제주 유나이티드)은 4강전까지 1분도 그라운드를 뛰지 못했지만, 벤치에서 묵묵히 기다리며 팀을 뒷받침했다. (결승전 후반 35분 투입되어 팀을 위해 희생했다.) '원팀'이란 마인드로 후보 골키퍼 박지민(수원삼성), 최민수(함부르크SV)도 이광연의 선방에 누구보다 함께 기뻐했다. 선수뿐 아니라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된 스태프의 활약도 컸다. 김성진 의무 트레이너, 오성환 피지컬 코치 등은 과학적인 훈련 프로그램, 선수 회복 시스템을 가동해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부상자 0명이라는 기적을 만들었다. 치열한 조별리그, 토너먼트를 거치면서 21명의 스쿼드를 적절하게 관리하고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낸 경험은 분명 다른 대회에서도 큰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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