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랜드(LA LA LAND, 2016)
"이곳에서 모든 감정이 폭발한다."
오글거리는 카피에 이 영화를 그냥 지나칠 뻔했다.
"5년 전 연애한 구남친 만나는 영화야."
오색찬란한 3차원적 스토리를 한 줄로 요약해버린 친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이터널 선샤인>, <500일의 썸머>의 뒤를 잇는 멜로 영화의 걸작 <라라랜드>를 2016년 마지막 날에 만났다. 제73회 베니스영화제 개막작, 여우주연상 엠마 스톤, 제41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관객상, 제52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개막작. 부산국제영화제 1분 만에 매진. <라라랜드>의 연이은 수상 소식은 사실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제 수상 소식은 비평가와 대중의 온도차 때문인지, <라라랜드>에 더 어렵고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랏빛 밤을 배경으로 탭댄스를 추는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2016년 마지막 영화로 택했다. <위플래시>로 대박을 친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예술과 사랑을 두 손에 쥐고 마법 같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연기자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의 첫 만남은 짜증과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짜증 섞인 경적 소리와 맞받아치는 가운데 손가락으로 만난 두 사람. 제멋대로 연주를 하고 해고를 당한 재즈 보수주의자 세바스찬은 미아를 차갑게 지나친다. 계속 엇갈리던 두 사람은 결국 재미없는 파티에서 다시 만나 서로를 알아간다. 경쾌한 노래와 시원한 밤공기가 어우러지면 두 사람의 탭댄스는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룬다. 어느덧 푹 빠진 두 사람은 각자의 꿈과 희망을 위한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꿈'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하며 두 사람의 행복에는 금이 간다. 재즈에 관해서는 타협을 모르던 세바스찬은 결국 생계를 위해 밴드에 들어가 상업 음악을 시작한다. 계속된 오디션 탈락과 막연한 미래에 고민하는 미아는 마지막으로 1인극을 준비한다. 위태로운 두 사람은 꿈과 희망의 도시 '라라랜드'에서 결국 떠나며 서로 멀어진다.
<라라랜드>는 뮤지컬 영화다. 영화를 여는 첫 시퀀스는 덥고 짜증 나는 고속도로에서 펼쳐지는 군무다. 잘 짜인 합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카메라 워크에도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노래와 어우러진다. 화려하고 경쾌한 군무가 끝나고 자연스레 일상으로 돌아가는 연기자들을 보며 <라라랜드>에 흥겨움에 관객은 푹 빠진다. 강렬한 오프닝이 끝나고 두 주인공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가까워진다.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며 티격 거리다 강렬하게 끌리며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사이가 된다. 할리우드에서 펼쳐지는 사랑은 고전 영화에 대한 오마쥬가 가득 담겨있다. 특히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이 많이 사용하던 2.55:1 비율의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 촬영해 더욱 고전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 피아노부터 탭댄스, 왈츠까지 모두 열심히 연습해낸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의 사랑스러운 하모니는 그 자체로 환상적이었다.
조심스러운 첫 만남의 수줍은 탭댄스도 기억에 남지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랑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즐거운 두 사람의 왈츠 장면이었다. 플라네타리움에서 두 주인공이 왈츠를 추는 장면은 '압도적'이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와이어에 매달려 허공에서 두 사람이 사뿐사뿐 왈츠를 추는 장면에서는 한껏 몰입해 두 남녀와 함께 우주를 헤엄치는 느낌이더라. 뮤지컬 영화의 매력은 노래가 8할은 차지한다고 보는데, 'City of Stars'는 OST가 유명한 <원스>, <맘마미아>의 명곡보다 가슴속에 콕콕 박힐 정도로 감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아이맥스 영화는 <그래비티>, <아바타>처럼 블록버스터에 어울린다 생각했다. 하지만 <라라랜드>처럼 마법 같은 영상미와 조화로운 음악을 자랑하는 영화도 매우 잘 어울리겠단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존 레전드도 깨알같이 세바스찬의 친구 뮤지션으로 출연해 (당연히 레전드급인) 타고난 노래는 물론 훌륭한 연기력을 뽐냈다.
I think I want it to stay (지금처럼만 계속됐으면 좋겠네요) - 라이언
You never shined so brightly (지금 그 무엇보다도 밝게 빛나네요) - 엠마
<라라랜드>는 로맨스 영화다. 사실 마지막 시퀀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저 밝고 경쾌한 뮤지컬 영화라고만 생각했다. 아니면 'Fallig Slowly'란 명곡을 남긴 <원스>처럼 멜로디로 기억되는 영화 정도? 두 사람의 갈등은 지나치게 단조롭고, 갈등의 폭도 그다지 날이 서있지도 않다. 서로의 꿈(할리우드 스타와 재즈바 사장)을 응원하는 두 사람은 어느덧 현실의 벽(거듭된 오디션 실패와 금전적 문제)에 부딪혀 결국 혼란스러워하다 포기하고 만다. 그들이 포기한 게 꿈인지 혹은 꿈을 위해 함께 손잡던 사람인지 몰라도. 한 사람이 먼저 성공하며 상대에게 희생을 은연중에 강요하며, 이게 진짜 원하던 게 아니냐며 다그치는 부분은 평면적이고 단조롭다. 노래 가사처럼 '지금처럼만 계속됐으면 좋겠다'면서도 상대에게 노력하지 않았던 세바스찬. '지금 그 무엇보다도 밝게 빛난다'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밝게 빛나던 연인을 인정하지 않았던 미아. 둘 모두의 책임으로 그들은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5년이 흐르고 다른 모습으로.
만약에 말야 우리 같은 마음이라면 다시 되돌아볼까
만약에 말야 우리 정말 사랑했다면 지워 낼 수 있을까
- 노을, <만약에 말야> 中
'만약에'라는 말만큼 의미 없지만 붙잡고 싶은 단어가 따로 있을까? 모든 연인은 헤어지고 난 뒤 '만약에'를 가정하며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리워한다. '만약에 파티에서 끝까지 남아있어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화보 촬영을 포기하고 1인극을 보러 갔더라면', '만약에 경적을 울리며 기다리는 그를 그냥 지나쳤다면.' 무의미한 가정의 가장 완벽한 해피엔딩은 세바스찬의 마지막 연주와 함께 상상 속에서 펼쳐진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그들이 꿈꿨던 이상적인 판타지는 오색 천연한 모습으로 환상적으로 이어진다. 짙은 회한에 잠겨 떨리는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세바스찬의 눈빛은 그 자체로도 복잡한 감정을 쏟아낸다. 그리고 한곡을 더 들을까 묻는 현 남편에게 이쯤이면 됐다고 말하며 돌아서는 미아는 현실로 돌아온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성공한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추억을 곱씹는 일도 충분히 황홀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며, 많은 관객들이 마지막 장면에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루지 못한 인연, 성공하지 못한 꿈일지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고 밝게 빛나는 소중한 추억이니 말이다. 그걸 현실로 끌어오는 순간 3류 막장 드라마가 되는 걸 명심한다면, 그런 추억팔이는 충분히 아름답고 훈훈한 결말이다.
+ 영화를 보고 정확히 2년 후 LA로 갑작스러운 출장을 떠났다. 라라랜드니 할리우드니 하는 기대보다는 장거리 비행, 그보다 더 피곤한 장거리 운전이 걱정되는 일정이었다. 정신없는 현지 미팅과 사업장 견학을 마치고 이제야 좀 쉬나 싶었는데 임원이 한마디 하셨다. "라라랜드 봤나요? 거기 한번 가봐야지?"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연스럽게 구글맵에 그리니치 천문대를 치고, 주변 맛집까지 나도 모르게 검색을 하고 있었다. 낭만적인 라라랜드의 명소도 사랑하는 사람과 와야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조심조심 밤길 운전을 하며 오르막을 올랐고, 겨우 주차 공간도 찾았다. 천문대 입구 쪽은 공사 중이었고, 북적거리는 느낌이 남산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하지만 잠시 의전을 멈추고 발걸음을 늦춰 홀로 야경을 바라보며 'City of Star' 노래를 트는 순간 세상이 달라 보였다. 별들의 도시에서 꿈을 향해 울고 웃던 커플이 떠오르며 낭만이 펼쳐졌다. 음악이 가진 힘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