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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Sep 26. 2019

Would You Erase Me?

[영화]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2014)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사랑이 끝나는 순간. 그 기억을 파헤치며 추억을 거슬러 짚어가는 영화. 10년 만에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을 무려 30만 명이 다시 찾은 이유는 아마 비슷할 것이다. 멜로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는 호평을 들었기 때문에, 혹은 10년이 흐른 지금 다치고 아물기를 반복했던 사랑의 조각을 되새기기 위해서 말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터널 선샤인>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개인적 경험이 더해지며 완성되는 영화라고. 치열했던 이별의 온도, 핑크빛으로만 가득할 줄 알았던 연애의 마지막, 후회되는 그 순간의 망설임. 서로 뜨겁게 사랑했던 이들이라면,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조각을 끼워 맞춰보며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바라볼 것이다. 과연, 나라면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를 찾아갈 것인가?


감각적인 영상미로 유명한 미셀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촘촘하게 이어진다.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이별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혹은 헤어진 연인이 자기와의 기억을 삭제했다는 소식에 충동적으로) 라쿠나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기억을 지우며 실제로 남보다 못한 사이, 아예 남남이 되어버린다. 아팠던 기억이 사라질 때는 개운함을 느끼지만, 절대 잊고 싶지 않았던 소중한 추억들이 사라질 때는 괴로워하며 제발 멈춰달라고 소리 지른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조엘은 운명적으로 클레멘타인을 다시 만난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몬탁 해변가에서. 그리고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의사와 금지된 사랑에 빠졌던 메리 역시 기억이 지워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다시 그를 짝사랑한다. 기억을 지우면 결국 새롭게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터널 선샤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하얀 눈이 내린 겨울바다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두 배우의 애틋한 사랑도 인상적이다. 미셸 공드리가 아날로그 감성으로 직접 창조한 공간 속에서 뛰어노는 배우의 연기력도 일품이다. (조엘의 유년기를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CG가 아니라 실제 3m짜리 탁자를 만들기도 했다.) 코믹 연기의 1인자 짐 캐리는 말수도 적고 잘 웃지도 않는 소심한 조엘을 연기했다. 특히 20분 정도가 흐르고 노래가 흘러나오며 등장하는 펑펑 우는 짐 캐리를 보면 장난기 하나 없는데도 순식간에 공감을 자아내더라. 케이트 윈슬렛 역시 <타이타닉>의 모습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막무가내 제멋대로의 클레멘타인을 그려냈다. 다섯 가지 색깔로 머리를 염색하며 서로 다른 감정선을 잘 표현해낸 그녀는 더 이상 부서진 타이타닉의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헐크(마크 러팔로), 프로도(일라이저 우드), 스파이더맨의 연인 MJ(커스틴 던스트) 등 10년이 흐른 지금 주연 배우로 성장한 이들의 조연 연기를 보는 맛도 쏠쏠하다.


기억을 지워가는 조엘의 발버둥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억을 지워가는 순서가 최신 기억부터 점점 더 먼 기억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별을 맞이한 마지막은 당연히 서로를 미워하고 헐뜯고 서운했던 감정들로 가득하다. 반대로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던 연애의 출발은 늘 그렇듯 풋풋하고 기억하고 싶은 핑크빛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을 표현하는 기법 역시 기발하고 감각적이다. 갑작스레 주위 사람과 상대방이 사라지거나, 강가에 누워 사랑을 속삭이던 순간 갑자기 낯선 길바닥에 누워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조엘이 행복했던 기억만 살려둔다고 해서 연애의 재출발이 성공적일 수 없다. 똑같은 이유, 비슷한 감정에 따라 결국엔 헤어지고 다투는 아픈 절차를 반복할 테니. 하지만 대체 왜 메리는 직접적으로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망각'의 중요성을 넌지시 물어보는 것일까?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일단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기르게 된 것이다.

- 니체, <도덕의 계보학> 中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변화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빗대어 설명한다. 낙타는 의무와 복종의 정신을, 사자는 부정과 자유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창조의 놀이를 위한 거룩한 긍정, 자신의 세계를 획득할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망각'이란 단순히 기억을 지우고 무의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망각이란 불행한 기억을 초월하려는 능동적인 힘, 어둡고 우울한 정서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이란 것이다. 새롭게 다시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결국 서로가 연인이었으며, 험담하며 서로의 기억을 삭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혼란스럽고 민망한 상황에서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는다. 아프고 슬펐던 기억은 잊고, 지금 현재에 마주한 사랑을 다시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과거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순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 모두 '사랑'의 감정을 지나칠 수 없다. 아픈 기억에 힘들어하는 사람도, 새로운 사랑에 설레는 사람도.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이를 관통하는 감정은 '사랑'이다. 연애의 방식이 달라졌고, 결혼의 형태도 똑같진 않지만 사람은 똑같다. 눈 앞에 아름다운 장면을 마주할 때 함께 보고 싶어 하는 이가 떠오르거나. 힘들고 지치고 모두가 내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도 아무런 이유 없이 포근하게 안아줄 이가 있거나. 각자 자신이 꿈꾸는 사랑의 형태가 다르겠지만 '행복'을 위한 만남이란 공통분모는 똑같을 것이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만나 단 한 번의 싸움 없이 행복하기만 하길 바라는 건 SF영화다. 치열하게 싸우고, 후회 없이 표현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언제나 믿어주는 게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원 제목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과거에 얽매여 현재의, 혹은 미래의 사랑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전 연애의 아쉬움과 슬픈 기억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에서 고쳐나갈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 결국 과거가 아닌 현재기 때문이다. 많은 여운이 담긴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마지막 "Okay"처럼.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면 라쿠나사를 찾는 발걸음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고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루이스 부뉴엘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해도 결코 기억을 지우진 않을 것 같다. 그 당시의 아름다웠던, 혹은 슬펐던 기억도 온전히 나의 몫이고 내 인생을 채워준 소중한 부분이니까. 과거로 꼭 돌아가고 싶다거나 반드시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감정이 아니다. 그저 함께 걷던 길, 같이 웃었던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노래처럼, 그때가 아니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행복한 감정은 잊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애써 지우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희미해져 가니깐.





+ 혁오가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곡 '공드리'도 두고두고 듣기 좋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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