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션 (The Martian, 2015)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민폐를 끼치는 맷 데이먼이 이번엔 '화성'에 남겨졌다. 전쟁터 한복판(<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그를 구하는 것만큼 이번 임무도 녹록지 않다. 하지만 늘 그렇듯 민폐는 짜증이 나는 상황이 아니라 모두를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SF영화 <마션>은 화성판 '캐스트 어웨이'로 불리는 생존 영화다. '우주'라는 체험적 무대가 바탕이지만 아이맥스 촬영을 포기했는데도 매우 높은 인기를 끌었다. 오히려 아이맥스 효과를 최대한 활용한 <그래비티>가 일반 상영관 관람객을 다소 놓쳤다면, <마션>은 진입장벽을 낮추고 최대한 많은 고객을 품으려고 차별화를 두었다. 아쉬움이 물씬 남는 이십세기폭스코리아의 마케팅에도 영화가 약 480만 명의 관객을 모은 건 오로지 '우주'란 소재와 영화의 완성도 덕분이다. (구닥다리 폰트야 그렇다 쳐도 최현석 셰프의 마션 패러디 영상은 대체 무슨 의도일까?)
"살려야 한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나사 대원을 무사히 구조해 지구로 귀환시키는 게 유일한 목표다. 간단한 듯 간단하지 않은 어려운 임무에 전 세계가 하나가 뭉친다. '하나를 위한 모두'(All for one)란 인도주의 정신이 영화의 해피 엔딩을 이끌어나간다. 나사 아레스 3 탐사대의 식물학자 출신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는 모래폭풍을 만나 낙오된다. 탐사대 대장 멜리사(제키사 차스테인)를 비롯해 나사 직원 전부 그가 죽은 걸로 알고 지구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그는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낙천적인 성격의 그는 남은 식량을 계산하고 직접 감자를 재배하며 화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결국 지구와도 연락이 닿는다. 악몽 같은 디스코 음악을 벗 삼아 감자를 재배하고, 꺼져있던 패스파인더를 되살리며 화성을 탐사한다. 자신만의 극한 생존기를 찍으며 지구로 돌아오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동안 전지구는 그의 생존을 위해 힘을 합친다. 심지어 몰래 '태양신' 우주선을 개발하던 중국도 "이건 정치가 아니라 과학이다."라며 힘을 실어준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긍정의 힘'으로 요약 가능한 앤디 위어의 동명 소설을 훌륭하게 스크린으로 옮겨냈다. 그는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등 'SF 거장'으로 유명하지만, <프로메테우스>로 자존심을 구기기도 했다. 하지만 '낙천적인 SF' <마션>을 통해 완벽히 부활했다. 주인공 마크 위트니의 가장 큰 재능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낙천적인 성격'이다. 그리고 영화의 편집도 그의 낙천성을 그대로 활용하며 유쾌한 웃음을 주더라. 예를 들어 화성에 홀로 남겨진 그에게 스트레스, 고립감, 우울증이 극도에 다다랐을 거라 예상하는 전문가의 말 이후에 곧바로 디스코 음악에 맞춰 제멋대로 파티를 펼치고 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또한 감자에 싹이 난 걸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마크 와트니에 이어서 곧바로 지구에서 치러지는 와트니의 엄숙한 장례식을 연결하는 식이다. (한편 고독한 와트니의 셀프 카메라 '화성 일기'에 고프로 액션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관객의 눈을 대신해 주인공의 1인칭 시점 이야기 진행에 큰 도움을 준다.)
이렇듯 <마션>은 '재난 영화'란 분류에 어울리지 않게 대책 없이 밝다. 그리고 이게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가장 큰 장점이다. SF 영화라면 결정적 순간의 긴장감을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실패, 죽음이 등장하며 여러 인물 사이의 인간적 고뇌가 충돌하지만 <마션>은 다르다. 영화 내내 그 흔한 사망자나 부상자도 없으며 (유일한 부상자 와트니 역시 꿋꿋하게 혼자서 치료를 해낸다.) 갈등도 거의 없는 편이다. 유일한 갈등은 대장의 구닥다리 디스코 음악 취향에 대한 불평 정도니. (NASA 국장의 냉정한 판단도 충분히 용인 가능한 수준이다.) 지구로 무사 귀환 중이던 탐사대원들도 고민의 여지없이, 희생정신을 발휘해 화성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홀로 남겨진 와트니 역시 그들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위로한다. 마지막에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노래 'I will survive'가 흘러나오면 영화를 감싸는 '낙천성'이 보는 이에게까지 전해지며 가슴이 따뜻해진다. (데이비드 보위의 'Starman'등 음악도 영화의 맛을 더욱 살린다.)
'우주'라는 공통분모에서 자연스럽게 <그래비티>(2013, 알폰소 쿠아론 감독), <인터스텔라>(2014,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가 떠오르더라. 매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우주 영화는 매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각각 광활한 우주에서 '생의 의지'를 놓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험기가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이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다르다.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은 '삶의 복원력'을, <인터스텔라>의 매튜 맥커너히가 '부성애'에서 힘을 얻었다면 단연코 <마션>의 맷 데이먼은 '낙천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작품성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앞선 두 영화만큼이나 <마션>도 호평을 얻었다. 가족과의 사랑, 시간 여행, 롱테이크 우주 유영 등 지난 영화들의 믿음직한 흥행 요소를 배제했지만 <마션>은 셋 중 가장 과학적이고 오밀조밀하며 현실적이다. '아시달리아 평원', '아레스 발리스 계곡' 등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된 지형을 참고했고, 실제 미국 휴스터 나사 본부에서도 3주간 촬영을 했다더라.
영화 촬영 협조는 굉장히 이례적이고 파격적인데, 영화를 보고 나면 상당히 이해가 된다. 혹자는 화성에서 혼자 살아남기보다 조직 사회에서 각자 제 몫을 충분히 하는 <마션> 속 나사 직원들이 더 비현실적이라고도 하더라.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냉철하게 판단하고 결단을 내리는 국장 테디 샌더스(제프 다니엘스), 명확한 업무지시와 열정적인 일처리가 돋보이는 중간 관리자 빈센트 카푸르(치웨텔 에지오포),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똘돌 뭉친 야무진 탐사대장, 사면초가에 빠진 구출 작전에 한줄기 빛처럼 단서를 제공하는 천재 과학자 리치 퍼넬(도날드 글로버). 그리고 야근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많은 나사 직원들까지. 일사불란하게 '무사귀환'이란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치는 과정에서 '과학의 위대함'도 돋보인다. 누구 하나 비용적 문제를 들먹이지 않으며 '삶의 소중함'에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척박한 화성에서 감자 재배하기, 망가진 패스파인더호를 수리해 의사소통 체계 만들기, 탐사선을 활용한 비상 도킹 방법 등 다양한 문제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어떻게든 답을 찾아낸다. 어찌 보면 이런 완벽히 조화로운 상황에서 유머와 낙관이 넘쳐흐르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티 없이 밝은 영화 <마션>을 보며 관객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느덧 새로운 우주 영화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항상 그렇듯 신비한 우주는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선물하기에.
+ <마션>은 TV로 다시 봐도 재밌다. 아내가 저런 상황에서 살 수 있겠냐고 물어보길래 문과, 그 중에서도 철학을 전공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편지 한 통 쓰고 아마 굶어죽겠지. 한 3일 지나서."
+ <인터스텔라>, <마션>을 이어서 보면 묘하게 맷 데이먼 인상이 달리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