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 2014)
"앨랜 튜링은 기회가 없었지만 내게는 기회가 주어졌다. 16살 때 자살하려 했지만 이 자리에 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이상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순서가 올 것이다.
stay wierd, stay different
<이미테이션 게임> 각본을 맡은 그레이엄 무어가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하고 남긴 수상 소감이다. <위플래쉬>, <아메리칸 스나이퍼>, <사랑에 대한 모든 것>등 유독 쟁쟁한 작품들의 경쟁을 이겨내고 수상한 만큼 새삼 대단한 느낌이다. 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바꾼 인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미테이션 게임>이 흥미로운 소재를 매력적으로 풀어냈기에 점수를 높게 받은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큰 파문을 일으키고 유독 남달랐던 앨랜 튜링이란 천재 수학자를 다루는 방법은 제법 따뜻하다. 그레이엄 무어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보니 새삼 앨랜 튜링에 대한 제작진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앨랜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27세 천재 수학자다. 그는 탁월한 천재성을 뽐내며 독일군의 애니그마를 해독하는 기밀 작전에 투입된다. 1,590억의 10억 배라는 경우의 수를 풀기란 당대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도 힘들었지만 앨랜 튜링은 달랐다. 팀원들이 일일이 암호를 해독하려 발버둥 칠 때 그는 '크리스토퍼'란 튜링 머신이 유일한 답이라 여기고 몰두한다. 하지만 암호 해독에는 유능했던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젬병이었다. 거짓말도 못 하고 직설적으로 날리는 독설에 사회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다행히 협동은커녕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운 성격인 그는 암호 해독팀의 유일한 여성 수학자 조안 클라크(키이라 나이틀리)를 만나며 조금씩 팀원과 힘을 합친다. 마침내 애니그마를 해독하는 튜링 머신을 완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겼지만, 그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특히 성적 취향의 차이 때문에 오히려 영국 공권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한다.
전쟁, 스파이 스릴러, 러브 스토리, 인권. <이미테이션 게임>에는 여러 가지 장르적 요소가 가득 담겨있다. 오히려 전쟁 영화라고 규정하고 보기에는 초점이 튜링 개인에 맞춰져 있어서 다소 심심한 느낌마저 들더라. 오히려 튜링의 학창 시절 이야기는 브로맨스의 감정을 과하지도, 시시하지도 않게 절묘한 선을 지키며 그렸다. 아울러 스튜어트 멘지스(마크 스토롱)가 <킹스맨>, <팅거 테일 솔저 스파이>에 이어 카리스마 넘치는 첩보원으로 등장해 재미를 선사했다. 이렇듯 다양한 장르적 재미가 가득 담겨 있음에도 몰입이 흐트러지지 않는 건 교통정리를 잘해준 덕분이다. 매춘 혐의로 고통을 받는 나약한 튜링의 현재, 2차 세계대전 애니그마와 싸우는 고뇌하는 튜링의 과거, 힘든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 크리스토퍼에게 의지하는 튜링의 대과거. 3가지 시점을 교차하면서도 복잡하거나 조잡한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각본의 힘이 <이미테이션 게임>의 첫 번째 강점이라면 두 번째 힘은 역시 배우다. 항상 털털하고 유쾌하지만 강단 있는 여성 역할만 한다는 비판을 받는 키아라 나이틀리.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비슷한 역할인듯하지만 훌륭하게 제 몫을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기초조차 모르는 아웃사이더 튜링을 서서히 변화시키는 열쇠 역할을 충분히 유연하게 해냈다. 물론 돋보이는 건 역시 베네딕트 컴버배치다. 흔히 '잘생김을 연기하는 못생긴 배우'로 유명한 그는 <이미테이션 게임>의 중추적인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 <셜록>과는 비슷한 듯 다르다. 셜록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타인이 상처 받을 걸 알면서도 자신의 우월함을 뽐내며 그대로 질러버리는 소시오패스형 천재라면, 튜링은 아예 그런 개념 자체가 없다. 자신의 행동이 왜 남들이 싫어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를 있는 그대로 해석해버리는 답답한 천재다. 과하면 덜 떨어지고 재수 없을 수 있는 위험이 큰 캐릭터는 컴버배치는 영리하고 절묘하게 그려내 매력적으로 재창조했다.
무거운 분위기에 비해 뜻밖에 유머러스한 영화다. 곳곳에 튜링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에서 빚어지는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특히 이성과의 관계에서 튀어나오는 삐걱거림이 웃음으로 다가오곤 한다. 개인적으로 전쟁이 끝난 후 튜링의 삶이 더욱 궁금했는데 그건 <이미테이션 게임>이 담아내지 못해서 아쉬웠다. 이과가 아니라 그런지 몰라도 거대한 '크리스토퍼'의 작동 원리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물론 영화도 적극적으로 설명하진 않았다.)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을 뺀다면 제법 흥미롭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훌륭한 영화였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이야깃거리도 많더라. 여러 측면에서 명작 <뷰티풀 마인드>도 떠오르고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편집상 등 후보에 올랐고 최종적으로 그레이엄 무어가 각색상을 받았다.)
튜링에게 타인과의 소통이란 복잡한 경우의 수를 따지는 암호 해독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지나치게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착한 거짓말, 예의를 차리는 표현, 비꼼과 칭찬을 넘나드는 묘한 뉘앙스. 언어는 인간 사회 사람의 약속이지만 상황과 사람에 따라 지나치게 혼동되기 마련이다. 천재 튜링이 특히 취약한 사회적 함의는 도저히 해독 불가능한 것이다. (실제 튜링이 'You're welcome'이란 관용어구가 환영의 의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좌절했다는 일화만 보더라도.) 오히려 송신자, 수신자가 정한 약속만 안다면 아무리 난해하고 긴 코드도 명쾌한 메시지인 암호가 더 편하고 믿음직하다. 이렇듯 타인이 왜 날 이해하지 못하는지, 내가 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필연적으로 없다.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다름'에서 오는 혼란과 오해를 순전히 조금 더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폭력을 가한다면 그건 틀린 것이다. 동성애, 종교, 인종, 지역 등 수많은 다름 그 자체가 틀린 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은 더욱 이 영화를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