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자는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라면
엄마 잃은 슬픔과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
모든 스트레스를 다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많이 행복해지고 싶다.
스페인은 왠지 여자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잘 웃었으며, 솔직했다.
관광객이라 그랬겠지만, 여자에게 친절했고
무엇보다 친근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스페인의 열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그냥 그곳이 좋았다.
이제야 제대로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여자는 스페인에서 꿈같은 12일을 보냈다.
다시 돌아온 여자는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이제 현실을 살아야 할 차례다.
여자는 이제 5번째 회사를 다닌다.
'요미 커피'
카페 프랜차이즈 본사다.
워싱톤 작업실을 다닐 때부터
요미 커피의 대표님으로부터 입사 제안이 있었지만
회사를 다니는 중에 이직하는 것을 배신 행위라 생각했기에 정중히 사양했다.
여자에게 회사는 좋든 싫든 다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타이밍이 정말 좋았다.
김실장을 복붙 한 김 팀장에 놀란 그 타이밍에 정말이지 딱 그 타이밍에 연락이 닿은 것이다.
여자에게
그건 명백한 이직의 신호였다.
요미 커피는 많은 면에서 여자가 이전에 다녔던 회사들과 달랐다.
사람들은 친절했으며 서로를 존중했다.
회사가 아닌 단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람들이 순했다.
여자는 그들에 동화되고 싶었다.
이곳에서라면 욱하는 성격도 못된 말투도 고쳐질 것 같았다.
여자는 요미의 편안한 분위기를 닮고 싶다.
얼마 후
카페 붐이 일어났다.
이 정도면 여자는 일 복을 타고났거나 일을 몰고 다니는 게 확실하다.
친구들은 가는 데마다 왜 저러냐며 혀를 찼다.
프랜차이즈가 뭔지도 모르는 여자 앞에 오픈해야 할 매장이 산더미처럼 늘어났다.
한 달에 3개.. 4개.. 5개..... 오픈이 줄을 잇는다
여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물론, 여자가 직접 공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여자는 기본도면만 그려주면 되었다.
여자가 그랬듯, 협력사에서 모든 디테일을 풀고 정해진 기한에 공사를 마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왜 이렇게 바쁜 것일까?
안타깝게도 요미 커피의 협력사는 엉망진창이다.
도면은 그릴 줄 아는 건가? 싶을 정도의 파일을 보냈고 그나마 제때 보내지도 않았으며
겨우 받은 도면에는 마감재는커녕, 어설프게 뚝뚝 끊어진 채 그려진 선들이 가득했다.
이런 걸 이 부장에게 가져갔더라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만화 그리는 거야?"라며 쏘아붙였을 것이다.
아니.. 아예 보지도 않았으려나?
이 부장은 마감재가 없는 도면을 '만화'라고 했다.
여자는 요즘 매일같이 만화를 기다린다.
재미도 없고, 연재일도 제멋대로인 그런 만화다.
백번 양보해서, 만화만 늦어졌다면 여자는 좀 더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현장조차 제때 마감되지 않았다.
분명 공사 마감일인데 작업대가 없고, 페인트칠을 하고 있고, 바닥이 덜 말라있다.
여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월드와 굿피플에서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돈을 받고 일하면서 저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무료봉사를 해도 저따위로는 해서는 안되었다.
협력사 사장의 뇌구조는 대체 어떤 모양일까?
확실한 건 그 사람의 뇌에 '신뢰'라는 단어는 없다는 것이다.
협력사 사장의 공사 지연 핑계는 거의 드라마였다.
고모가 수술을 하셨다고 하질 않나.. 차가 고장 나서 삼촌차를 빌리느라 늦었다 질 않나..
부모님 핑계는 안 되는 걸 보니 스토리가 바닥난 게 분명하다.
여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돈은 다 받아 놓고..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후.... 아'
여자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부드러워지고 싶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높아졌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안 되는 사람이다.
"사장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되죠!! 일정을 지키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대체 언제까지 그러는 건데요! 그래서 몇 시요 몇 시"
"아니~ 대답만 하지 마시고요! 부탁 좀 드릴게요!! 네에??''
여자는 요미 커피에서 배운 '부탁드릴게요'를 넣어 최대한 화를 누른 채 말했다.
그것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협력사 사장은 오늘도 같은 표정이다.
어색하고 지겨운 그 풀 죽은 표정..
여자는 그 표정 뒤에 숨겨진 그의 욕심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