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미세하고도 큰 차이
징글징글한 업무와 책임과 이별을 한지 수개월이 지났다.
여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급정거한 자동차처럼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여자는 어떻게든 남은 에너지를 소진해야 했다.
보이는 대로 그려보기도 하고
운동을 하며 학원을 다니기도 했으며
창의성을 되살린다는 핑계로 전시와 공모전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여자는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하다.
'아... 좀 더 참을걸 그랬나..?' 세상에.. 여자의 마음에 후회가 든다.
대단 능력을 가진 줄 알았던 여자. 여자는 회사를 나오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용기도 다시 신입으로 돌아갈 겸손 남아있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오월드 디자인 사장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으응.. 잘 지냈어?"
"이 부장 회사 나왔다며.! 그.. 해.. 그래... 힘들었구나"
"프로젝트 공사해보고 싶다고 했지? 여기 한번 가봐!"
"재밌어할 것 같아서.. 그래.. 그래 잘 지내고..!"
오월드 사장님의 추천이라니, 의외다.
하지만, 여자는 지금 여기저기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런 멘탈이 이어진다면, 다시 굿피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여자는 서둘러 면접을 보기로 했다.
브랜드 공사이 아닌 프로젝트 공사를 한다 것이 여자는 꽤 마음에 든다.
'이제야 전공을 살리는 일을 하는구나..!'
여자는 오월드와 굿피플에서 기본기를 잘 닦아 이런 기회가 온 것이라 생각한다.
대치동 작은 빌딩.
안내에 따라 여자는 지하로 내려갔다.
'우... 와! 정말 멋지다..!"
이곳은 여자가 꿈에 그리던 사무실이다.
노출 콘크리트와 유리가 정갈하게 맞물려 있고,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백색의 파티션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여자는 잡지에 나올법한 곳에 있는 것만 같다.
'워싱톤 작업실'
다소 민망한 이름이지만, 미국 목수였던 사장님이 지은 이름으로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도전한다고 했다. 약간의 스타트업 같은 곳 인가? 여자는 흥미로웠다.
이제껏 해온 일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워싱톤 작업실의 직원이 되었다.
매일같이 마커로 유리창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앞에선 지하, 뒤에서는 1층인 지형이다)
여러 마감재를 골똘히 바라보며 마감재를 맞추어 보기도 했으며,
이곳저곳에 제안서를 작업하여 넣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일 년이 가까워오자 여자는 슬슬 불안해진다.
'워싱톤 작업실'에 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없는 날이 더 많았고
여자는 일하기보다, 준비와 상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갉아먹는 것 같은 기분.
여자는 그 길로 워싱톤 작업실을 나왔다.
사실, 여자의 엄마를 간호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있었다.
난소암 4기
여자가 스무 살 무렵 발병한 암은 잘 치료되는 듯했다.
5년만 지나면, 암환자 등록에서도 제외된다며 가족 모두가 기뻐했는데..
그 나쁜 암이 5년째 재발한 것이다.
여자는 엄마를 정성껏 간호한다.
여자는 엄마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었다.
엄마는 여자 때문에 아프다.
중환자실은 하루 2번
오전 6시와 점심 12시, 두 차례 개방되었다.
여자는 자기의 죄를 씻는 양, 모든 시간에 늦지 않고 엄마를 면회한다.
그것이 지금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기운을 조금 차린 엄마는 일반실로 병실을 옮겼다.
엄마가 입을 연다.
"그.. 결혼 좀 천천히 하면 안 돼?"
"엄마는.. 네가 좀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좋아 보이는 건 맞는데, 그래도 모르잖아~"
"우리 딸이.. 잘 생각해봐"
여자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 나이였지만, 5살 많은 남자 쪽에서 먼저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자
부모는 모두 교사
여자가 생각하기엔 나쁠 것이 없는 조건이었다.
엄마는 의심이라도 하는 걸까? 여자는 엄마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 엄마나 얼른 나아~ "
"하이고.. 그려.. 그려.. 발이나 주물러봐..!"
"아이고.. 시원하다. 시원해~역시 우리 큰딸 잘해.."
"그려.. 너는 잘할 거야~ 잘할 거고 말고.."
엄마의 병세가 조금 나아졌다.
여자도 계속 쉬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슬슬 취업을 생각하던 어느 날, 굿피플 디자인에 있던 이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본인이 사업을 시작했으니, 이쪽으로 출근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의였다.
전에는 오월드 사장님의 소개
이번에는 굿피플 이사님의 소개라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지만,
두 분의 인맥이 별로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모양 디자인'
여자의 4번째 회사다.
이사님은 공동 대표였다.
모양 디자인은 여성 의류 브랜드의 공사를 담당하는 인테리어 회사다.
여성 복이라 그럴까?
유난히 세련된 집기와 인테리어가 여자가 보기엔 꽤나 멋졌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흔하지 않던 5일 근무와 칼퇴근도 마음에 든다.
직원을 많이 생각하는 회사 같다.
'그래, 나도 내 몸을 혹사시키지 말아야지'
여자는 이곳에 오래 다닐 생각이다.
모양 디자인에서 하는 일은 굿피플에 비하면 누워서 떡먹기였다.
설계팀을 담당하는 김 팀장의 책임 하에 일은 나눠졌고, 책임과 검토 또한
김 팀장이 대신했다.
지루하지 않도록 일감도 적당하게 유지되었다.
여자는 이곳을 적당하게 다닐 생각이다.
'오지랖 부리지 말아야지'
'당해봤잖아! 그래 봤자 나만 고생이야! 누구 하나 인정해주지도 않는다고!'
'뒤에서 욕만 먹지..'
여자는 머릿속으로 되뇐다.
'적당히.. 하자. 적당히....'
그런데, 그날은 수양이 부족했나 보다...
시공팀 김 팀장이 여자에게 발주 도면 수정을 요청했는데,
여자는 어렵다며 디테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확인, 설명, 대안을 내는 것은 오월드와 굿피플에서는 기본이었으니까
김 팀장은 대리 주제에 팀장에게 설명하는 거냐며 대뜸 짜증을 낸다.
"아하.. 아니.. 그냥 해! 내가 하라는 대로... 그냥 해!!"
미안하지만, 여자는 일에서 만큼은 질 생각이 없다.
"그게 아니고요..!"를 시작으로 여자는 도면에 대해 다시 설명한다.
여자의 목소리도 한층 높아졌다.
"야..!! 그냥 하라면 해! 뭔 말이 이렇게 많아!!!"
김 팀장이 한 껏 목소리를 높인다.
이.. 말투... 어디서 들어봤는데....
앗..!
어쩌지..김실장과 꼭 같은 말투다..
여자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오래 다니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