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하얗고 두툼한 손목 보호대를 끼운 채
오늘도 열심히 도면을 치고 있다.
탁탁 타 타탁 툭-
타타 타탁 툭 툭 툭-
언제 들어도 매끄러운 여자의 도면 치는 소리다.
피아노를 6년 넘게 배워도 영 실력이 늘지 않던 여자지만
키보드 연주(?)만큼은 자신 있었다.
'아얏... 아....'
매끄러운 키보드 연주 사이로 미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목 통증과 위염의 콜라보..
하루를 3일처럼 쓰면 어떻게 되는지 여자의 몸은
통증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아프고 신경 쓰이지만, 여자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시간이 나면 병원을 한번 가볼 것이다.
타 타탁 툭- 탁탁 툭툭-
탁탁 투투 툭- 탁탁 툭-
"야! 하드웨어 개수 써서 도면 다시 뽑아와!"
밤 12시가 넘은 고요한 시각, 김실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여자에게 소리쳤다.
'다시? 다시라고?'
'게다가 하드웨어를?'(그건 김실장의 일이다.)
'저 돼지 같은 게 지금 뭐라는 거야?'
여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늘은 화를 숨기지 못할 것 같다.
여자는 정말이지 김실장이 싫다.
짧은 시간 큰돈을 번 이 부장.
이부장은 조금 더 멋진 공사를 하고 싶어 했다.
브랜드 공사의 꽃은 명품 공사라나 뭐라나..
하여간 꿈에 부푼 이 부장은
사업 확장이라는 명분을 들어 명품 관계자들을 이사로 채용했으며
영업하느라(매일 같이 술을 퍼 마시느라) 시간이 없어지자 실무 관리자로 김실장을 채용했다.
여자도 처음부터 김실장이 싫었던 건 아니다.
저녁만 먹고 집에 가는 걸 보았을 때도, 침까지 질질 흘리며 자놓고 야근했다고 했을 때도
야동을 회사 컴퓨터에 깔아놓고 밤마다 본걸 알았을 때도
세상엔 저런류의 사람도 있구나 했을 뿐이다.
여자는 그렇게 쓸데없는데 관심을 둘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문제는, 김실장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잘나 보이고 싶었던 걸까?
김실장은 굿피플의 초기 멤버들의 노고를 유독 깎아내렸다.
"쟤네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고, 원래 다 그 정도는 하는 거야!"
"본사에서 밀어줘서 그런 거지!"
"야~ 운이 좋은 거야!"
굿피플로 이직한 여자와 류대리, 그리고 이 부장은 결코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남들이 못한다는 일들을 겨우겨우 해내서, 쌓은 신뢰이고 성과였다.
고차원적인 멘털을 가진 이 부장도 각자의 수고는 각자의 것으로 돌렸으며
남의 수고와 칭찬 따위를 뺏어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굿피플의 룰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사건건 인정하지 않는다.
본인이 모든 것을 잘 관리해서 여전히 잘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 부장에게 하소연이라도 할까 했지만
술병이라도 난 걸까? 요즘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우회할 길이 없다.
"아니~ 하드웨어를 왜 내가 해야 돼요?"
여자가 눈을 동 그렇게 뜨고 김실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김실장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직 많이 남아있는 직원들의 시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야! 회사에서 하라면 하는 거지! 마.. 말이 많아?!!"
"이... 부장이.. 이 부장이.. 그렇게 가르쳤어..??"
"하~아.. 요즘 애들 진짜 버릇이 없네!!"
여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한다.
여자도 한 성격의 소유자다.
김 부장은 여자를 잘 못 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 진짜!! 드어~러워서 못하겠네!!!"
여자는 김실장의 눈을 끝까지 마주친 채, 혼잣말인지 반말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사무실 문을 '쿵'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러움과 해방감, 이 부장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이 온통 뒤섞였다.
여자는 그대로 휴대폰의 전원을 끈다.
이 따위 대우를 받으려고 영혼까지 갈아 넣은 게 아니었는데...
저따위 사람에게 관리를 맡기다니 이 부장은 진짜 바보야. 바보 멍청이야..
'흐.. 흑..'
여자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
며칠 후 이 부장과 연락이 닿았다.
"야! 그래~ 내가 알지, 내가 너 고생한 거 알지.. 그러니까 네가 와야지!"
"굿피플에 네가 없으면 쓰나!"
"김실장이 심했어! 알아.. 내가 다 알아!"
"네가 딱~한번 눈감고 다시 돌아와!"
"아무것도 없던 일로 해줄게~ 내가!"
알긴 뭘 알까, 하나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 이 부장..
어차피 사무실에도 없을 거면서
뭘 없던 일로 한단 말인가..
하지만, 생전 안 하던 감언이설로 설득하는 이 부장이 여자는 마음에 쓰인다.
쌓아놓은 성과를 그냥 버리기 아까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자는 속는 셈 치고 굿피플로 다시 들어간다.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뻔뻔하게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이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여자는 굿피플과 영영 작별을 했다.
잠시 쉬는 동안
여자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했다.
아무도 여자처럼 일하지 않았다.
병원 갈 때만 연차를 쓰는 것이 아니라,
진짜 쉬기 위해 연차를 썼다.
직장인 3년 차
여자는 징글징글한 일들과 이제는 진짜 이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