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장이 독립을 선언했다.
오월드 디자인을 위해 수년간 일했으니, 이제 본인 사업을 시작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역시 '이슈 메이커' 답다.
일 폭풍이 이제 겨우 지나갔는데
또 이슈를 만들다니..
여자는 이제야 안정을 찾았는데..
대체 이 부장은 왜 이러는 걸까?
아마도 이 부장은 온 세계가 자신을 위해 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이 부장이지만
여자는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한다.
민주임이 사라진 후
오월드 디자인에서 1년을 맞이하기까지
정말이지 숨 막히는 날들을 이었지만
이 부장의 지도가 있어서 그나마 방향을 잡고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장의 나 홀로 선언에 여자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며칠 후
이 부장이 여자를 따로 부른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너~를 데려가야겠다!"
"푸.. 하하하하"
여자가 이번엔 참아 내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지? 뭘까? 어떻게 하면 이런 자존감을 갖게 되는 거지?
여자는 진심으로 이 부장의 뇌 구조가 궁금하다.
번거로운 과정 없이 직원을 채용하려는 이 부장의 계획.
이건 누가 봐도 이 부장을 위한 제안이다.
"생각을 좀 해볼게요!"
여자가 당차게 대답했다.
이 부장이 당황해한다.
여자의 생각 따윈 이 부장의 플랜에 없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 기회를 얻은 여자는
오월드 디자인과 이 부장을 비교 분석해보기로 한다.
눈치 없고 욕심 많은 짠돌이 사장님
눈치 빠르고 못 돼먹은 이 부장
사실, 여자는 오월드 디자인에 잔뜩 질려있었다.
엄청난 짠돌이인 오월드 사장님은
회식 중 메뉴 추가가 아닌 사리 추가를 당당히 외치는 위인이었으며,
회사가 법인으로 바뀌었다며 쥐꼬리만 한 월급을 1/13로 나누기까지 했다.
돈을 그렇게 끌어 모아놓고..
고생을 그렇게 시켜놓고..
겨우 이런 대우라니..
이 부장의 제안이 아니었어도 여자는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고민 대상이 이 부장이다.
일만 잘하고 나머지 능력은 현저히 부족하며,
종체 종잡을 수 없는 멘트로 멘탈을 흔들어대는 이 부장.
"후아...."
여자는 천천히 깊은숨을 내뱉었다.
'못돼도 일 잘하는 사람이 낫겠지?!'
여자는 그렇게 이 부장의 회사로 이직을 결정했다.
여자의 두 번째 회사는 '굿피플 디자인'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라지만
본사에게만 좋은 사람이고 싶은 이 부장의 속마음을
여자는 이미 눈치챘다.
"안녕하세요! 굿피플 디자인입니다~ 네에~ 네에~"
"아~ 팀장님, 확인해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에~ 삼십 분 안에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혹시 다른 확인사항은 없으시고요?"
"네에~ 잘 알겠습니다~ 네에~연락드릴게요~"
설계팀과 의류 브랜드 본사 담당자 간의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
전문 상담원 못지않은 대화는 매일 수차례 이어졌다.
서비스는 굿피플의 차별성이었고
'친절 응대, 빠른 피드백, 일정 명기'에 온 정성을 쏟아부었다.
여자는 게임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다.
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니 다음 스테이지에 도착한 기분이랄까
그렇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여자는
새로운 무언가를 위해 전력을 다한다.
좋은 서비스를 보내니, 좋은 말이 오고 갔다.
이 부장의 마법에 빠진 걸까?
여자는 진짜 좋은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루에 감사하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늘어난 직원들을 보는 것도 왠지 뿌듯하다.
사업은 이 부장이 시작했지만
회사는 여자가 꾸리고 있는 것만 같다.
여자는 오월드 디자인에 부었던 열심 못지않은 열정을
굿피플에 다했다.
오월드 디자인은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면,
굿피플은 순전히 여자가 원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다.
여자는 그렇게 워커홀릭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또래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는 것보다
일에 빠지는 것이 백번 낫다고 확신하는 여자다.
눈에 보이는 성과 역시 여자를 움직이게 했다.
굿피플 디자인이 생긴 지 6개월 만에
의류 브랜드 협력사 중 매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정말이지 징글징글한 의지의 소유자들이다.
여자를 포함한 수명의 직원들이 함께한 일이지만 여자는 제 일처럼 기뻤다.
어느새 여자가 없으면 굿피플은 망한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돌았다.
여자는 고속열차를 탄 기분이다.
어깨는 멈출지 모른 채 한껏 올라가고 있었다.
"이 부장 닮아가요?"
여자와 함께 이직한 류대리가 말했다. 오랜만에 들은 불쾌한 소리였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여자가 류대리를 노려보며 앙칼지게 쏘아붙인다.
"허허... 아니... 너무 그러는 것 같아서.."
류대리는 머쓱해하며 자리를 피했다.
아니.. 그렇다니..?
뭐가 너무 그렇단 거야?
일을 제대로 하려면 이 정도는 감안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본사에 그렇게 한 것도 아니잖아?
류대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여자는 팀원을 가르치는 주고 있는 것뿐이다.
" 점심시간엔 모니터 끄고 나가~"
"전화 말투를 좀 더 친절하게 바꿔봐."
" 언제 끝날지 시간은 공유해야지!."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이란 말이다.
매사에 대충 넘어가려는 저 사람들이 이상한 거 아닌가?
업무 초반의 가이드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렇게 상세하게 가르쳐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바쁜 와중에 가르쳐준 거라고!
여자는 서운하고 억울하다.
류대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