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은 지나

두 번째 스페인

by 오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나는

20년 지기의 참된 호흡을 보여주었다.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여행을 결정했으며

비행기 티켓과 숙소는 물론, 주요 관광지까지 순식간에 확정 지어버렸다.


친구는 4박 6일, 나는 6박 8일.


"스페인 여행치고는 너무 짧은 거 아냐?"

"야! 비행기 타다가 시간 다 보내겠다."

"다음에 일정을 조정해봐~"


부러움 섞인 걱정과 제안이 주위를 둘러쌌지만, 우리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유럽 여행치 고는 너무도 짧은 일정이라는 것은

우리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우리가 가용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만든 시간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때여야만 했다.

그때 그 시간이 우리에 너무도 필요했다.


/


일에 찌든 친구는 휴식을 원했고

나는.. 나는 어디든 좋았다.

감옥 같은 이곳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


수중에 없었다.

있더라도 그걸 여행 같은 곳에,

겨우 나의 욕심을 채우는 곳에 써는 결코 안되었다.


여행의 기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찾아왔다.


얼마 전 마친 프로젝트가 잘되어 포상 휴가가 주어진 것이다.

나는 회사를 통해 스페인 여행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야~ 네가 또 얼마나 잘했길래..!"

"우와~너네 회사 진짜 좋다.."


사람들은 나와 회사 중 누군가는 꼭 선택해 칭찬하려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대단한 성과나 엄청난 배려가 아니면 주어질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것은 기브 앤 테이크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부재, 새로운 이슈로 수개월째 평소보다 몇 배로 많은 일을 했고

마침 그것을 나쁘지 않게 끝냈다.


나는 얼마간 더 많이 일했고, 회사는 그에 적당한 비용을 지불했을 뿐이다.


아마 새로운 인력을 채용했더라면, 외부에 일을 맡겼더라면

회사는 훨씬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회사의 배려를 합리화했다.

누가 누구에게 칭찬받거나 감사할 그런 건은 아니라고.






2017년 6월 1일

드디어 우리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무지 줄지 않는 업무 탓에 캐리어를 끙끙 끌고 가서

오전 내내 일을 해야 했지만,

겨우 며칠이 지나면 다시 돌아와야 했지만

잠시라도 현실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좋았다.


설렘 때문일까

비좁은 좌석과 긴 시간도

승무원이 건네주는 와인과 함께라면 참을만했


잠을 잔 건지, 살짝 기절을 한 건지

모를 13시간이 지나고서야

드디어, 우리는 마드리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와~ 야.... 진짜 대박.. 정말 피곤해."

"이거 맞는 거야? 하아.. 하하..."

"참나.. 어떻게 오긴 왔다.. 그지?"


공항을 빠져나온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차량을 타고 숙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호텔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도보로 프라도 미술관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많은 객실을 보유했기에 적절한 서비스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나가야 돼! 나가야 돼!"

"미술관 도슨트도 예약했단 말이야~"


피곤에 잔뜩 들었지만 일정을 시작해야 했다.

천근만근 무거던 몸에 의지 불어넣는다


"후우.... 야! 가자!"

"하아.. 진짜.. 그래.. 가! 나가보자고."


밖으로 나와 무작정 길을 걸본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지만 좋다. 습도 없이 강렬 한 햇빛.

진하면서도 깔끔한 인상이다.


"아.. 이렇게 행복해도 돠는 거야?"


꿈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냥 길을 걷는 것뿐인데 기분이 좋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자유롭고 행복했다.





7년 전,

그때도 나는 드리드를 처음으로 여행했다.

노래를 부르던 스페인을 드디어 올 수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행복했었, 슬픔이나 상처 따위는

생각하게 하지 않는 이곳의 낯섦이 좋았다.


/

나는 잊고 싶었다.

/


나는 나의 가진 모든 결핍과 굴레에서 벗어나

깨끗이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이전의 나의 불행은 나의 탓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변할 수 있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거야!'


모든 것은 의지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힘낸다면, 나만 힘낸다면 못할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

다른 것과 좋은 것은 다르다

/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조건에 안정감을 느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실패 그 자체였다.

조금 더 알았어야 했고

조금 더 생각했어야 했다.


나의 조급함과 편협함이 결국 스스로를 힘들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시원한 물줄기가 흩뿌려지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프라도 미술관에 가기 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다.


뜨거운 햇볕이었지만

커다란 천막 안쪽으로 들어서니 제법 원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리브 오일이 듬뿍 뿌려진 차가운 샐러드와 치즈가 잔뜩 올라간 라자냐가 나왔다.

나는 원래 샐러드와 올리브 오일을 좋아한다.

끈적거림 없는 레싱과 선한 채소, 통통한 새우가 입맛을 돋다. 큰 기대 없이 주문한 라자냐도 치즈가 열 일 한 덕뿐일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세르베사..!

스페인 여행에 맥주를 빼놓을 수 있을까?

우리의 테이블에는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알함브라 맥주 두병이 놓여있었다.


여행의 묘미는 낮맥이.

맥주 몇 모금에 볼이 발갛게 달아랐다.


"야! 진짜 너무 좋아..!"

"아니~ 이래도 되는 거야?"

"야 너무 행복해! 안 그래?"

"아니~ 너무 좋은 거 아니냐고~ 하하"


좋다는 말이 벌써 몇 번째인지..

친구는 알았다며 제발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냈지만

친구 역시 그곳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내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야.. 진짜 좋다. 그렇지??"

"야.. 야.. 이거 봐봐..!"

"어머, 세상에.. 진짜 좋다!"

"아니~ 이렇게 좋아도 되느냐고...!!"


잠시, 앵무새라도 된 걸까

한참 동안이나 우리는 그렇게 의미 없는 말을 무수히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