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쨌든 경험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by 오아

맥주를 마셔서일까

시차 적응을 못해서 일까


미술관 투어를 시작하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이내, 졸음이 쏟아졌다.


'이게.. 어떤 기회인데..'


눈에 힘을 잔뜩 줘 보았지만 쌍꺼풀만 짙어질 뿐

잠이 좀처럼 깨지 않는다.


/

색채가..

구도가..

상징적 의미가..

사적 배경이..

/


미술관.. 원래 이렇게 어려웠던가?


가이드의 설명이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평소 취미로 즐겨 보던 그림이 이렇게 어려운 '학문'일 줄이야

집중력과 체력이 빛의 속도로 떨어져 갔다.


미술관이 잘못된 것일까?

오늘 일정이 과한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끌어올렸던 에너지는

이제 눈을 뜨고 있는 것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기대하고 기다렸던 코스 중에 하나였지만,

지금 당장에 탈출하고 싶을 뿐이다.


두 시간의 사투 끝에 작품 설명이 끝났다.

겨우 자유 시간을 얻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더 이상의 관람을 하지 않고

도망치듯 프라도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불과 몇 시간 전 생기 넘치던 모습은 말끔히 사라졌다.


"아.. 지친다. 지쳐.. 과외받은 기분이야..."

"한 시간만 좀 잘까...?"


저녁 식당 예약에 플라멩코 공연까지

아직 남은 일정이 많았지만

반 수면에 빠진 이 상태로 더 이상 무엇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왜 이곳이어야 했을까

아무 기억도 없는 곳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곳은 내가 선택한 곳이었다.

말버릇처럼 가고 말겠다던 스페인

이곳은 나의 의지로 만들어 낸 시작이었기에

나로서 의미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이곳에서 변하고 싶었다.

나는 이곳에서 정리하고 싶었다.


나의 이기심과 자만과 욕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의 상황을 멀리하면서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 싶었다.


많은 자극을 통해 현재를 잊고 싶었다.

많은 경험을 통해 힘을 얻고 싶었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들은 훌쩍 어딘가를 떠나고 나서 많은 생각과 기회를 얻었다.

그게 무슨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그런 영화 따위가 실제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내가 가진 기억은 그랬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여기서 행복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단 며칠의 간의 여행으로 상황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

기적을 바라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무언가를 얻어가고 싶다. 변하고 싶다.


조금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면 좋겠다.

조금 더 똑똑해지고, 자신감을 채울 수 있다면 좋겠다.


조금만 노력하면 극적인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나는 믿고 있다.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진짜 더 이상은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노력하면,

내가 끝내 포기하지만 않으면

상황이 좋아진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비록 지금은 놀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버티고 버텨서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 어두운 터널을 벗어날 힘을 길러야 한다.

답답함과 무기력함을 이겨내야 한다.


철없는 학생처럼

작은 것에 기뻐하고 설레어하고 세상을 궁금해하는 마음을 다시 가져야 한다.


그것이 나를 살게 하고

그것이 나의 심장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삶의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아까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잠을 이길 수 없었던 나는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한 시간쯤 먼저 일어 난 친구는 심드렁한 얼굴로

애꿎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일어났어?"


금쪽같은 일정들이 사라졌다... 잘 거면 푹 자고 아침에나 일어나던가.


한밤도 아닌, 새벽도 아닌

애매한 3시라니

한 시간이라도 일찍 일어나던가..


나보다 더 일정이 촉박한 친구의 눈치가 보인다.


'아.. 너무 배고파"

"뭐 먹으러 나갈래?"


배고픔 반, 짧은 여정의 아쉬움 반, 한 시간 더 자버린 미안함을 담아

호텔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바로 옆 24시간 운영하는 맥도널드가 있었고

여행지의 새벽 공기를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철컹.. 철컹... 야~ 이게 왜 이래?"


호텔 정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을 줄이야..

관리인 아저씨께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다행히도 문을 열어주신다.


'철컹.. 달그락.. 달그락..'


우리가 나가 마자 아저씨는 자물쇠로 문을 다시 잠갔다.


"아니.. 우리 어떻게 들어가라고?"

"여기 위험한 거야?"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여기까지 나왔는데

(몇 걸음만 가면 맥도널드인데)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로비 불도 켜있고, 아저씨도 잠들지 않았으니

햄버거 세트 하나만 딱 포장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나와보니 호텔 뒤편에 있는 클럽 입구에

잔뜩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모여 있었다.


"우와.. 여기도 엄청나게 마시나 보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을

천천히 구경하는 여유까지 부리며 맥도널드로 들어갔다.


"어머어머 야.. 어떻게??"

"야.. 지금 나오는 거 아닌가 봐~ 어떻게?"


맥도널드 내부의 모습에 우리는 웃음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겉보기엔 일반 매장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매장의 대부분은 셔터로 닫혀 있었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나 볼 수 있는 티켓 창구만 개방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야.. 이거 아니었나 봐.. 빨리.. 빨리 가자"


친구와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리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자물쇠와 유리벽으로 막힌 창구를 보자

인간미 있게 느껴졌던 술 취한 사람들이 경계대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햄버거 세트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모든 미션을 완수한 것 같은 그때

웬 남자가 말을 걸었다.


딱 봐도 제정신 아닌 것 같은 남자는

온몸을 휘청거리며 우리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꺅~"

"야! 뭐야~뭐래~ 야.. 빨리 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달리듯 호텔 문 앞까지 도착했고

'달그락달그락'거리는 자물쇠가 열리기까지

심장 쫄깃한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린 친구와 나는

깔깔거리며 한 동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야.. 무슨 도전을 한 거야? 하하하.. 하하"

"이게 뭐라고.. 이렇게 존 거야.. 하하하하하.."

"아니.. 왜 무서운 건데?.. 하하핳"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모든 일을 겪은 기분이랄까?


이놈의 상상력이 새벽부터 활발해지는 바람에

비극 와 희극을 넘나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