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출근길은 실로 험난했다.
2000년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지옥철,
끼고 치이는 1호선과 2호선의 위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각오한 일이다.
'강남 한복판'
오월드 디자인의 위치를 여자가 원했었으니까.
여자가 예상치 못한 난관은 야근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야근을 한다는 건,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지독했던 야근은
단번에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금씩, 체계적으로 시작됐다.
어느 날은 삼십 분, 어느 날은 한 시간을 넘겼고,
어느 날부터인가 저녁은 당연하게 회사에서 먹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저녁만 먹고 퇴근할 수는 없었던 여자는
직원들을 따라 저녁 일을 준비했다.
그렇게 하루 두 끼, 하루 세 타임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자의 친구들은 '맥도널드 보다 낮은 시급'이라며 놀려댔다.
노동착취를 당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여자는
'야! 네가 몰라서 그래, 회사는 원래 다 그런 거야'라고 대꾸하며 친구들의 놀림과 만류를 깨끗이 무시했다.
'하루라도 빨리 배우자!'
'그래야 이곳을 떠날 자격이 생기는 거야.'
여자는 지치고 피곤했지만, 전문직이 되기 위해 이 과정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업무 비중은
사무보조 50% / 도면 작업 10% / 욕받이 40% 다.
누가 봐도 전문적인 일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발주서의 글자 하나로 엄청난 책임과 돈이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여자는 적잖은 담력과 집중력을 총동원해야 했다.
대단하진 않지만, 꼭 해야 하는 일,
그런 일들은 모두 여자의 차지였고
그런 일들은 매일 매시간 오월드 디자인에 넘쳐났다.
과중된 피로와 긴장 탓에 오타와 실수는 빈번했다.
피로 누적=집중력 저하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지만, 타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늘도 민주임이 부장실로 불려 간다.
"야! 민주임, 너는 아직도 이걸 몰라?"
"아니~ 네가 안 봤어? 안 본 게 말이 돼?"
"허~참나~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돼?'
한껏 격양된 이 부장의 목소리가 문밖을 넘었다.
여자는 알고 있다.
그것은 분명 여자에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여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선배는 지금 선배의 책임을 다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다 그런 곳이니까!
여자가 봐온 드라마나 tv, 영화에서도 다 그랬다.
감정이 적당히 결여된 사람들이 모여
기계적으로 체계를 만들고
사원은 주임 대신, 대리는 주임 대신,
과장은 대리 대신 책임을 지는 곳
대의를 위해 작은 가치들은 희생되기도 하는 곳, 여자는 회사를 그런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때론(아니, 매일) 이 부장의 행태가 너무하다고 느꼈지만,
여자가 익숙해지면 민주임도 회사도 곧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여자의 마음이 조급해진다
사실, 민주임의 업무 능력은 뛰어났다.
본사와 현장 소장, 누구와도 막힘없이 대화했으며
가끔은 이 부장의 실수를 찾아내기까지 했다.
일을 그렇게 잘하면서
내내 이 부장에게 당하기만 하는 민주임이 여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자였으면 분명 '부장님도 실수하시잖아요!' 하며 한마디는 쏘아 줬을 것이다.
아니, 여자였으면 더 이상 오월드 디자인에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월드 디자인 6년 차 민주임.
민주임은 친절하지도 쌀쌀맞지도 않은 성격의 소유자다.
늘 여자와 함께 퇴근했지만, 결코 일을 도와주지 않는 민주임.
'같이하면 둘 다 일찍 퇴근할 수 있을 텐데..!'
여자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을 매일 밤 되뇌고 되뇐다.
민주임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선배의 의무라 생각하는 걸까?
뭐가 됐든, 여자는 피곤하다.
민주임이 어서 '효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길 바랄 뿐이다.
의류 브랜드의 협력사 '오월드 디자인'은 정말이지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인테리어를 바꾸면 옷이 잘 팔린다는 소문이 돈 걸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백화점에 입점한 브랜드들은 앞다투어 리뉴얼 공사를 했고
일을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여자는 경기장의 공처럼 이리저리 치였다.
그려달라는 도면과 그릴 수 없는 도면 사이에 치였고
새벽마다 이어지는 현장 전화에 치였으며
가끔은 여기저기 치이다 못해 밖으로 튕겨 나가기까지 했다.
그렇게 밖으로 보내진 여자가 도착한 곳은
아울렛 5층에 있는 10평 남짓한 아동복 매장.
벽면 공사가 없는 아일랜드 매장으로
가구와 전기, 싸인 공정밖에 없는 비교적 쉬운 공사 현장이다.
"가서 잘하는지 네가 보고 와!"
이 부장의 한 마디만 듣고 여자는 이곳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오월드 디자인입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작업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
여자의 인사를 못 들은 걸까?
대답은커녕, 현장에는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그저 묵묵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여자가 말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현장이다.
작업자 누구도 여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사람이 있는 걸 알기라도 한 걸까?'
여자는 애꿎은 도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설계실에서 밤새우는 것이 백배 낫다고 생각한다.
새벽 두 시,
무안함은 진작에 사라졌다.
'아.. 빨리 끝나고, 집에나 가면 좋겠는데..'
지친 여자 앞에 빵과 우유가 슬며시 놓인다.
목공 반장이 여자의 간식을 챙겨 준 것이다.
아무 할 일 없던 여자는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빵과 우유를 천천히 오래도록 먹고 마신다.
여자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얼마 후
여자가 담당한 현장의 수익이 정산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익이 남아 여자는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칭찬받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작업자의 간식을 사줘야 하고
부족한 비품을 확인하고
청소도구를 구비해 현장을 깨끗히 정리해야하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