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에서 계속)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등에서 땀방울이 굴러 내린다. 그 간질간질한 느낌이 기분이 나쁘다. 선크림이 땀에 섞여 녹아내리면서 눈가가 따끔따끔하다. 거울이 없어 확인은 못했지만 분명 얼굴도 엉망이었을 것이다.
뭐가 어렵다고 지금까지 양산 사는 것을 미룬 것인지, 스스로의 게으름을 꾸짖으면서 나는 간신히 길을 걸어갔다. 한 시간 같던 십 분의 시간이 지나자 눈앞에 드디어 카페가 등장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쁨이 이런 것일까. 한눈에 보기에도 허름하고, 오래된 티가 역력한 카페였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삶은 만두처럼 푹 익기 전 얼른 안으로 대피해야 했다.
문을 열고, 카페 안에 발을 딛는 순간 선선한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무거운 짐이 사라진 것처럼 어깨가 가벼워지고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이 개운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깥이 너무 더워 상대적으로 시원했을 뿐, 카페 내부 자체는 별로 시원하지 않았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인지, 혹은 에어컨이 고장 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어컨 대신 오래돼서 색이 바랜 커다란 선풍기 프로펠러 몇 대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데 온도가 너무 높아서 내가 몰랐던 것일지도. 어쨌든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력한 냉방을 원했던 입장에선 보통 아쉬운 게 아니었다.
카페 내부는 어두웠다. 블라인드가 창문의 4분의 3 가량을 가리고 있는 데다 조명마저 꺼져있었다. 거기다 가구들마저 짙은 갈색과 검은색의 오래된 목재라서 가뜩이나 침침한 카페 분위기를 더 가라앉혔다. 창 바깥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햇빛이 내리쬐고, 창 안쪽은 그림자가 낀 듯 어두컴컴하니 대비되는 게, 어딘지 에드워드 호퍼 (미국의 화가)의 그림이 떠올랐다.
카페에는 손님도 별로 없었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 세 명이 떠들고 있었고, 사장님으로 보이는 화장을 진하게 한 아주머니 한 분은 카운터 뒤에서 앉아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열돼있는 디저트도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았고, 특별히 볼만한 메뉴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쩐지 서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왜 이런 장면이 있지 않은가.
'카우보이 한 명이 작고 황량한 마을에 들어선다. 지친 목도 축일 겸 술집에 들어가지만, 그를 맞이하는 건 낡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다. 한 구석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고 바텐더는 카우보이에게 관심이 없는 듯 그쪽으로 얼굴도 돌리지 않는다. 쇠퇴하는 마을, 무기력한 사람들, 그리고 외로운 카우보이 한 명. 과연 이들의 운명은?'
혼자서 망상(?)을 하면서 나는 그나마 시원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이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지친 팔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 그 순간이었다.
".... 아 뭐야, 이거."
불쾌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식탁을 닦지 않기라도 한 건지, 목재 가구 위에 먼지와 때들이 끈적하게 켭켭이 쌓여있었다. 아니 끈'적'보다도 끈'덕'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한창 살림 초보일 때 -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 실리콘 손잡이가 달린 국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손잡이 부분에 먼지가 한창 들러붙어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자를 집을 때마다 손에 기분 나쁜 끈적거림이 느껴졌던 게 떠올랐다. 도대체 얼마나 테이블 관리를 대충 했길래, 아무리 목재가 관리하기 힘들다고 해도 이렇게 끈적인다는 것인가.
살짝 기분이 안 좋아졌지만 이제 와서 나갈 수도 없었다. 바깥은 덥고 마침 내가 시킨 커피도 나왔다. 그냥 기다려야지. 오래간만에 책을 읽으려던 계획은 잠시 뒤로 미루고 그냥 핸드폰이나 해야겠다. 그전에 테이블 조금은 닦아놓자. 이런 생각과 함께 나는 사장님에게 부탁해 커피와 함께 물티슈도 넉넉히 받아왔다.
물티슈는 오래되었는지 물기가 많이 마른 상태였다. 화장실에서 물이라도 적실까 했지만, 내 가게도 아닌데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그러진 않았다. 어쨌든 최대한 남아있는 물기를 짜내면서 테이블을 싹 문질러보자, 이럴 수가 거뭇거뭇한 무언가가 물티슈에 묻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까 전에 식탁에 살짝 닿았던 팔을 털어냈다.
멍해진다
날씨는 덥고, 사장님은 에어컨도 안 켜고, 커피 가격은 비싼데, 거기다 식탁까지 더럽다. 아침부터 계속 느꼈던 '오늘 하루는 재수 없을 것 같다'라는 이 기분이 헛된 걱정(?)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이 대강 맞아떨어졌으니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울상을 지어야 할지 살짝 헷갈리기 시작했다. 주식 매도, 매수 타이밍 고를 때는 그렇게 촉이 안 좋으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안테나가 잘 작동하는 것일까. 신의 장난인 건가.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로 이날 하루가 '운이 안 좋을' 운명이라 내가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해서 사소한 일들도 '이건 역시 안 좋은 징조야'라고 의도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상태인지.
만약 남편이 옆에 있었다면 후자가 맞는 거라고, 내가 요새 너무 피곤하고 정신없어서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것 같았다. 그 특유의 웃는 얼굴로 "자기가 너무 소심한 거야, 바보."라고 눈앞에서 말해준다면 이 불안감이 좀 덜해질 것 같은데, 출장 때문에 부산에 가 있다는 게 새삼 아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논리적으론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명할 길 없는 나만의 예감을 믿고 싶다는 욕구가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과학이 발전하고, AI가 그림도 그려주며, 유전자 조작 가위로 DNA 편집도 하는 21세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는 걸 잘 안다. 게다가 좋은 것에 대한 직감도 아니잖은가. 이 이상한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네스호에는 네시라는 괴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이 아직도 발견 못한 비밀의 장소가 네시가 숨어있다고 믿고 싶은 기분이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카페 안에서도, 나 자신의 이해할 길 없는 심리에 대해서 생각을 쭉 하다 보니 의외로 시간이 잘 지나갔다는 점이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 채로 물티슈로 식탁을 닦기를 반복했다. 석탄재 같은 때가 떨어져 나오는 광경에 처음에는 비위가 상했지만, 문지를 부분만 조금씩 색이 환해지는 걸 보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었다. 기분이 안 좋고 우울할 때는 이렇게 단순하고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구나, 다시 한번 실감했다.
쓱싹쓱싹
삐걱삐걱
끈적끈적
끼익끼익
복잡하고 정리 안 되는 생각이 알아서 부유한다. 나는 뭘 해야겠다는 의지도, 결심도 없이 물티슈 몇 장을 손에 쥔 채 테이블 위를 밀어내고 또 밀어낸다. 그리고 이날 하루 들어서, 정말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불안함, 초조함 그리고 짜증의 감정들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얼른 동생을 집에 데려다주고 할 일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잊은 채, 나는 그렇게 천천히 심리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 PART 3에서 계속. 아니 이렇게 길어질 내용이 아닌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