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길게 쓸 내용은 아니었지만?
커피잔 옆에 거무튀튀한 물티슈가 네 장 정도 쌓일 때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차분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동생이 검사를 마쳤다고 알려주었다. 내 할 일은 거의 끝났다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다시 저 땡볕을 맞으며 돌아갈 생각을 하자 뒷골이 땡겨왔다. 어쩔 수 없다. 일단 갈 길은 가야지. 슬픈 마음으로 천천히 카페 문을 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따가운 햇빛과 습기가 나를 덮쳤다. 눈앞은 어질어질하고 숨은 다시 막힌다. 사막 한가운데를 헤매는 구도자가 된 기분으로 나는 비틀비틀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병원에 도착한 뒤에는 모든 것이 평이하게 지나갔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과 임상심리사에게 동생의 증상에 대해 상담하고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주의사항을 듣고, 2주 치 약을 처방받고, 다음번 진료 시간까지 잡자 기분이 확 좋아졌다. 이제 동생을 집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내가 할 일은 전부 끝난다.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이제라도 내 원래 계획을 수행 (?) 한 뒤 저녁에 기분 좋게 사람들과의 뒤풀이를 가면 된다. 아침부터 계속 마음이 찝찝하고 복잡했던 것도, 이걸로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 살아남았다. 이걸로 해방이다.
나는 여동생에게 새삼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농담을 건네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가 들어왔을 때보다 차가 한 대 더 늘어난 탓에, 가뜩이나 좁디좁은 주차장은 더욱 협소한 상태였다. 게다가 내 차는 가장 나오기 힘든 위치 - 좁은 구석, 급격한 경사, 바로 옆에 벽 등등 - 에 세워져 있으니 한눈에 보아도 차를 빼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살짝 겁이 났다. 도로주행은 제법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입차와 출차는 긴장되는 일이었다.
"언니 차 뺄 수 있겠어?"
내 당혹스러움을 눈치챈 듯 여동생이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오기가 팍 솟아났다. 이래 봬도 난 주차의 지옥이라는 구축아파트에서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훈련을 거듭했다. 게다가 한 달 전에는 정말로 비좁고 어두운 지하 3층짜리 주차장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후방카메라도, 전방카메라도 없는 스무 살 먹은 올드카를 가지고서. 어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까짓것 한 번 해보자!
열혈만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나는 차 문을 열었다. 오랜 시간 땡볕을 받은 차 안은 후끈후끈하니 사우나가 따로 없었다. 잔뜩 열기가 올라오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으니, 갑자기 정말 거대로봇의 파일럿이 된 것 같았다.
"타. 출발할 테니까 안전벨트 잘 매고, 옆에 공간 있는지 좀 봐줘."
에어컨 좀 더 세게 틀라고 칭얼거리는 동생에게 한 마디 건넸다. 그리고 기어를 P에서 D로 바꾸고 조심스럽게 액셀을 밟았다. 무게 2.5톤의 묵직한 차량이 스무스하게 앞으로 향했다. 나는 대강 앞과 옆의 각도를 확인해 가면서 천천히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동생은 사이드 미러 너머로 옆을 보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아파트에서 자주 쓰던,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방향을 트는 기법(?)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몇 번의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다 보니 이쯤에서 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심 뿌듯했다. 역시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내 운전 실력을 의심하는 동생에게 이 언니가 이 정도는 충분히 한다고 보여줄 수 있어서, 또 이렇게 경험치가 오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오전부터 계속된 나쁜 예감도 이미 사라졌다. 편안하고 살짝 흥분된 마음과 함께 내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며 액셀을 밟았다.
"어, 언니, 옆에!! 옆에!!!"
동생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철판이 우그적거리고 뭉개지는 절망적인 소리가 내 귓가를 채웠다. 그건 내 차가, 소중한 나의 차 오른쪽 뒷문이, 주차장 코너의 시멘트 울타리에 짓이겨지며 내는 비명소리였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곧바로 기어를 P에 놓고, 주차 브레이크를 채운 뒤, 시동을 끄고서 차 문을 열었다. 차 문을 살피러 가는 그 짧은 길이 얼마나 길고 멀던지. 마침내 처참한 현장을 목도한 그 순간 나는 큰 소리로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아무래도 초보운전자인지라 한 번도 사고를 안 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다른 차 범퍼를 살짝 긁거나, 후진을 하던 중 실수로 연석에 뒷부분을 약하게 찍은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약간의 스크래치와 문콕 자국 정도는 있을지언정, 심각하게 차의 외관을 망치는 손상은 없었고, 나 역시 이 점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건 그냥 문짝 자체를 바꿔야 하는 수준이다.
"악, 젠장!!! 이런 ZK23#42!"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깊은 분노와 울분을 목소리에 실으며 나는 소리쳤다. 그리고 갑자기 깨달았다.
아, 내가 오늘 아침부터 느낀 이 불안함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구나.
나는 오늘 내 차 문짝을 거덜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구나.
하하하하, 이게 운명인 건가? :D
헛웃음이 나왔다. 머리가 터질 듯이 짜증이 치솟았지만 이상하게 화는 나지 않았다. 그냥 현실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차를 어떻게 뺄지도 모르겠고 - 전진이나 후진을 잘못하면 뒷 휀더까지 찌그러질 것 같았다 - 그냥 스스로가 등신 같았다. 땀은 미친 듯이 흐르고 있었고, 햇빛은 나를 태워 죽일 듯이 이글거렸다. 아마 그래서 더 정신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뒤 일은 정말 부끄럽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뿐이었다. 사진 상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당시 내 차는 정말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주차장 출구는 가뜩이나 경사도 가파른데 어울리지 않게 과속방지턱이 높아서 차가 반 정도는 비스듬히 아래를 향해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이러니 후진 기어를 넣고 엑셀을 끝까지 밟아도 차가 뒤로 갈 생각을 안 하고, 오히려 무게 때문에 앞으로 더 기울어 벽에 그대로 왼쪽 모서리를 박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나갈 시도를 할 때마다 문과 코너의 울타리가 점점 한 몸이 되어 찌걱찌걱 소리가 들리니 심리적으로도 미칠 지경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다른 차주분과 지나가는 행인들이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나의 탈출 방법을 고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부산에 출장을 간 신랑과 일을 보러 간 친정 엄마한테까지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온갖 난리를 쳤지만 내 실력으론 도저히 답이 없었다. 만약에,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 언제 소문이 퍼진 건지도 신기했지만 - 도와주러 왔다는 트럭 아저씨와 보험사 직원분의 몸을 사리지 않는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엄마가 올 때까지 차를 빼지 못한 채 동네의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간신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뒤 기억은 희미하다. 한번 주차장에서 난리를 친 덕분인지, 오히려 도로 주행은 쉬웠다. 다행히도 동생을 데려다주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고, 이후 우리 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끈 뒤에야 나는 현실을 실감하고 운전대에 무너지듯 고개를 파묻었다. 선팅을 안 한 앞 유리를 통해 햇빛이 따갑게 뒤통수를 내리쬐고 있었지만 차마 차에서 내리기가 무서웠다.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고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외관으로 먹고사는 차인데,
오래된 차라 부품도 구하기 힘들고 수리비도 어마무시할 텐데,
요새 돈 나갈 곳 많은데 어떻게 하지?
왜 나는 거기서 그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한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덜렁거릴까?
진짜 난 아직 모자란 사람인가 봐
이 모든 게 다 여동생 때문이야,
걔랑 얽히면 좋은 게 하나도 없어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런 생각을 하니까 네가 벌 받은 거야
오늘 뒤풀이 못 가겠다고 연락해야겠다,
제길 정말 기대했었는데,
후 나 같은 거 없다고 아쉬워할 사람 없을 거야
젠장, 왜 하늘은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지,
어쩐지 아침부터 이상했어,
엉엉 울고 싶다
몸에 힘이 쭉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 여기 있으면 통돼지구이가 되고 말 거란 위기감에, 부들부들 떠는 몸으로 차 밖을 나왔다. 차마 찌그러진 모습을 다시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도망치듯이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오후 일정이 있는 곳에 사정이 생겨서 불참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한 뒤, 신랑이 올 때까지, 그냥 미친 듯이, 밤늦게까지 유튜브만 보면서 멍하니 남은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나의 운수 나쁜 하루는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쓰고 나니 굳이 파트 세 개로 나눌 필요도 없는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 주간 질질 끌어온 이유는, 그때의 일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자동차 뒷문이 찌그러지고 허공에서 바퀴가 공회전하던 소리가 떠올라서 괴로웠기 때문이다.
끼이이익!! 찌지직, 휘이익!!! 우르릉, 부르릉! 어머, 아가씨 어떡해요? (이 와중에 아가씨란 말 듣고서 은근 기분 좋았다)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OO야. (작가 이름) 흥분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봐. 엄마가 곧 갈 테니까. 어어어, 어떡해, 차 더 찌그러진다!!
시간도 나름 지났고, 차 수리도 끝난 지금은 이 날을 차분하게 회고할 수 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고리관을 채우는 소음에 마음이 갑갑해지고, 속이 울렁거리며, 울화가 치밀어올라 글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래도 차 문의 상처도 아문 지금,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이렇게나마 글쓰기를 마무리하니 한풀이를 한 것 마냥 마음이 편해진다.
궁금한 게 하나 생기긴 했다. '운수 나쁜 날'이라고 지칭했으나 정말 이 날은 하늘이 점지하신 내가 운이 더럽게 안 좋고 짜증 나는 일만 생길 하루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안 좋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안 좋은 방향으로 해석한 것일까?
여기다가 안 좋은 습관(?) 같은 게 추가로 하나 생겼으니 이 사건 이후로 나는 조금만 불편하거나, 기분이 이상하거나, 물건이 땅에 떨어진다거나, 5년 넘게 안 신은 신발 끈이 끊어진다는 등의 일만 생기면 (그것도 두 번이나!) 뒷목이 서늘해지고 심장이 벌렁거린다. 마치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생기고 불행한 하루가 이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한창 강박증과 불안장애가 심했을 때가 절로 떠오른다.
어떻게 보면 운수 나쁜 날의 문제점은, 그날 자체가 안 좋게 흘러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여기서 파생된 온갖 후유증과 고민거리가 진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여전히 나를 조금은 귀찮게 하고 있으니까.
차문을 빠개버린 그 병원을 또 가게 될 줄이야. 그것도 두 번이나. 한 번은 아빠차를 타고, 다른 한 번은 사고가 난 그 차를, 대신 신랑이 운전한다는 조건 하에. 여동생이 진료를 보러 간 사이, 나는 무슨 관광지를 소개하는 가이드처럼 아빠와 신랑을 주차장에 끌고 가서 하소연을 내뱉었다.
"여기야, 여기. 너무 좁지 않아? 딱 봐도 어려워 보이지? 내가 괜히 고생한 게 아니라니까?!"
아빠와 남편 모두 다 '쉬운 장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할 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한 명은 운전을 사십 년 가까이 한 베테랑, 다른 한 명도 수동 운전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역시 백문이불여일행(?)이라고, 막상 두 사람 다 차를 뺄 때는 쩔쩔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즐겁던지. (...)
역시 혼자서 당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