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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현 Mar 17. 2019

결혼은 왜 하는 걸까?

부모님의 결혼과 우리 세대의 결혼은 완전히 다르다

스압 요약: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생존을 위해서, 부모님 세대는 결혼을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절대적으로 유리해서 결혼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행복하기 위해 결혼을 꼭 해야 하는 시대는 아니다. 저녁과 여유를 가진 삶을 살 수 있는 현대와 미래의 결혼의 의미와 형태는 지금까지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결혼을 하는 것이 생존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자아실현에 도움이 안 되면 결혼이 의미가 없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자아실현과 결혼이 맞아떨어지면 진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은 일시적인 감정이다. 만족스럽고 기분 좋고 안정되고 신나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감정이다. 이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손을 잡을 때에도, 나를 닮은 아이를 처음 안을 때에도, 돈이 많을 때에도, 반대로 돈이 없을 때에도, 때에 따라서는 고통스러울 때에도 느낄 수 있는 이상한 감정이다. 


이 단순한 감정에 지나지 않는 행복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목적이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고 살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인간이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를 해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번 사람도, 어떠한 업적을 이룬 사람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측은지심의 대상이 된다. 일에만 집중하다 이혼으로 가정이 파괴된 사업가, 마약 중독자가 되어버린 세계적인 뮤지션, 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정신이상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던 천재 수학자.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부러움이 아니고 연민이다. 


예수님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 조차 자신의 희생의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 도움을 준 사람들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이토록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고 숭고한 가치가 행복이다. 


어떻게 살면 행복할까? 


행복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인류의 종족 보존이다. 그리고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 사랑이다. 만약에 인류가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연애를 하지도, 결혼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연애와 결혼은 서로를 위해 서로 희생해야 하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다. 


사랑과 행복은 우리가 연애, 결혼, 섹스, 출산, 육아라는 도저히 이해타산적으로 계산해서는 할 이유가 없는 일들을 즐겁게 감당하도록 만든다. 연애 하면 행복하고 섹스를 하면 쾌락을 느끼는 것도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본능일 뿐 사랑의 감정을 빼고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행동들이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그것을 추구하다 보면 사랑을 하게 되고 가정을 만들고 생명을 만들고 새로운 세대를 만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을 행복으로 채우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을 넘어서 우리 가족의 행복이 되기도 하고 나아가 인류의 종족 보존에 기여하는 의미가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는 욕망의 피라미드를 통해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채워져야 하는 욕망들을 체계적으로 나열하였다. 


생리적 욕구: 의식주가 해결된 상태. 내가 신체적 요인에 의해 고통을 겪거나 죽지 않는 상태. 

안전의 욕구: 외부로부터 내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상태. 내가 외부 요인에 의해 고통을 겪거나 죽지 않는 상태.

소속의 욕구: 가족, 사회에 소속되어 나의 존재의 의미가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상태 

존중의 욕구: 가족, 사회에서 존중을 받아 나의 존재의 의미가 공동체 안에서 높은 가치를 갖는 상태

자아실현의 욕구: 외부의 존경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성취를 이루어 나의 존재의 의미가 최고의 가치를 갖는 상태. 


이러한 욕구들은 단계별로 채워진다. 사람은 안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안전의 욕구가 해결되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소속의 욕구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켜 나가기 위해서 인류가 발명한 사회 조직 중에 하나가 결혼을 통해 만들어지는 가족이다.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가정은 우리를 보호해주고 먹여주고 키워준다. 그리고 휴식을 준다. 


사회가 성숙하고 발전하면 가정의 역할을 사회에서 대신해 주기 시작한다. 사회가 성숙해지면 가정이 없어도 먹고살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대 전쟁 등으로 국가가 제 역할을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가정은 생존의 조건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의 형태가 갖추어지면서 1970년대부터는 가정이 없어도 생존은 할 수 있도록 기반 시설과 복지 제도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사회가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해결해주면 가정은 소속과 존중의 욕구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부터 가정이 생존이 아닌 여유와 편안함의 공간이 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들어 사회가 더 성숙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학교와 직장 등 소속할 곳이 생기고 소셜 네트워크 등의 발달로 인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사회에서 소속과 존중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산업 구조도 성실한 일꾼이 필요한 대기업 위주의 제조업 문화에서 전문성이 필요한 시대로 넘어가면서 2020년께에는 사회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재능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자아실현의 장이 될 것이다. 


2020년 이후에는 더 이상 기본적인 행복의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서 결혼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비혼율과 이혼율이 높아지고 결혼 연령은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서구사회를 보면서 동서양의 차이로 생각했던 일들이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우리 앞에도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미국은 개인주의적이고 한국은 집단주의적이라 다르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사회의 성숙도와 관계가 있다. 우리가 부러워했던 실리콘밸리의 혁신적이고 노동 시간과 비례하지 않은 생산성 같은 기업 구조도 우리나라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The All-or-Nothing Marriage (Eli J. Finkel, 2017)라는 책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사회가 생리적, 안전의 욕구를 해결해 주는 시기가 185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회가 자아실현의 장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전후이다. 결혼은 더 이상 행복의 필요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결혼을 해서 더 행복할 수는 있지만 결혼을 안 하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니게 된 것이다. 현대 미국에서는 1970년대에 결혼한 세대와 2010년대에 결혼하는 세대가 공히 자아실현의 목적을 가지고 결혼을 해왔다. 그래서 현대의 미국에서는 세대 간의 결혼의 목적이 큰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의 경우 할아버지 세대는 생존을 위한 결혼, 부모님 세대는 소속과 존중을 위한 결혼, 그리고 지금 결혼하는 세대는 자아실현을 위한 결혼을 해야 한다. 세대 간의 결혼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 세대에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이 큰 의미를 갖기가 어려워졌다. 부모님의 결혼에서 보아왔던 많은 것들을 새로 이해해야 하는 지금 결혼을 앞둔 세대는 결혼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결혼 결정과 결혼 생활에 중요한 성공 요인이 된다.


다섯 가지 결혼의 유형


시대에 따라 다양한 결혼의 형태가 존재해왔다. The All-or-Nothing Marriage (Eli J. Finkel, 2017)에서는 결혼을 크게 세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위해 하는 실용적(pragmatic, 1850년 이전) 결혼, 소속감과 존중을 추구하는 애정 기반(love-based, 1965년 이전) 결혼, 자아실현을 위해서 하는 자기표현적(self-expressive) 결혼이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추어 이름을 바꾸고 자아실현형을 더 세분화하였다. 크게 1980년 이전 생존형 부부, 80년대에서 2010년 정도까지 주를 이루었던 가정형 부부, 2000년 이후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권위 역전형 부부, 201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자아실현형 부부이다. 이 중 자아실현형 부부는 가정이 수단이 되는 부부와 목적이 되는 부부로 한번 더 세분화하였다.


1. 생존형 부부

먹고살기 위해 남성은 바깥일과 가정 보호를 전담하고 아내는 집안일을 전담하는 부부.


전쟁이 있었던 1950년대부터 경제 발전을 위해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던 1980년대 초까지 사람들의 당면 과제는 생존이었다. 그 당시에 결혼했던 사람들에게는 결혼에 있어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파트너가 필요했다. 여자는 혼자서 경제활동을 하여 생존할 수 없었다. 남자도 고된 경제생활 끝에 집에 왔을 때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남성에게 유리한 육체노동이 주된 경제 활동의 형태였기 때문에 대부분 남자에게만 사회적 경제 활동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 당시 젊은 이들은 “이 풍진 세상 혼자 살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힘들어서” 결혼을 해야만 했다. 할 수만 있으면 생존을 위해 꼭 해야 하는 것이 결혼이었다.

그 당시의 남성은 강하고 책임감 있고 가정을 잘 다스리며 밖에서 먹고 살기 넉넉한 돈을 벌어 오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이러한 사람은 심지어 혼외 관계를 해도 용서가 되는 시대였다. 최악의 악덕은 신체적으로 비실비실하고 돈 못 버는 남자였다. 여성은 현모양처로서 가정을 잘 보살피고 남자가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을 하고 다니든 잘 참아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최고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악덕은 남자의 외부 활동에 질투를 한다든가 가정에서 희생해야 하는 역할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든가 하는 일들이었다. 


이 시대에 남자가 신체적으로 강하지 못해 노동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가족 전체가 굶어 죽는 치명적인 위기를 가져왔으므로 혼외 성관계보다도 더 나쁜 일이었다. 또한 여자가 남자의 경제생활을 방해하거나 가정 내에서의 서포트 역할을 충분히 못하거나 돈을 헤프게 쓴다면 이 또한 가족이 굶어 죽을 수 있는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는 가정을 지키는 강한 남성과 궁핍한 가정 경제에서도 억세게 가정을 돌보는 현모양처의 시대였다.


최고의 남성상: 가정을 물리적, 경제적으로 지키는 남성

최악의 남성상: 약한 남자.


최고의 여성상: 없는 살림에도 꿋꿋하게 가정을 돌보는 여성.

최악의 여성상: 칠거지악. 남자의 외부 활동에 질투하거나 가정보다는 바깥일에 관심이 많은 여자.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


2. 가정형 부부

서로 안정과 소속감을 위해서 결혼한 부부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에는 중산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다수의 민중이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에 청년들은 소속과 존중의 욕구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기업들에서도 생존에서 소속과 존중으로 지향점을 재조정하였다. 그래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표어가 대중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와 닿았다. 


이제는 여성도 남성도 혼자서 살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사회 안전망이 발전하여 외부의 위협에 대해 남편보다는 경찰을 부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게 되었다. 서비스가 발달하여 남성이 집에서 밥 해줄 사람이 없어도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산업이 다변화되면서 여성에게도 일자리가 주어졌다. 여성도 남성이 밖에서 벌어다 주는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가정이 주는 소속감과 존중감은 그 당시의 사회가 채워주기 힘든 가치였다. 기업들은 직원들을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표어를 내걸었지만 직원들의 삶은 기업의 이윤을 위한 헌신적인 삶인 경우가 많았다. 회사에서 비슷비슷한 수많은 노동자들 중 하나인 내가 존중을 받을 경우는 거의 없었다. 먹고살 수는 있지만 내가 돌아갈 곳, 내가 소속된 곳으로써의 가정의 의미는 여전히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많은 남성과 여성이 가정을 시작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들에게는 힘든 사회생활의 안식처가 가족이었다. 밖에서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긴 노동 시간에 시달리면서 가정은 오아시스가 되어야 했다.  부부 둘만 있을 때에는 그나마 그게 가능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회적 지원이 없는 상황 속에서 둘 중 하나는 사회적 경제활동을 그만두어야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다. 대부분을 수입이 상대적으로 적고 출산을 감당해야 했던 여성이 가정을 맡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아니면 여성이 함께 일을 하면서 가사 도우미를 써야 했다. 


여전히 여성이 집안의 중심이기는 했지만 남성도 많이 도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정에서는 남성이 어떻게 아내의 일을 도와주느냐에 따라 좋은 남편이냐 아니냐가 판단되었다. 여성의 경우 가정을 돌보는 기본 임무 외에 돈을 벌고 커리어를 가지면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일이 먼저냐 가정이 먼저냐?"가 중요한 질문이 된다. 가정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일을 위해서 가정을 희생하다 보면 미래를 위해서 너무 중요한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아이의 병을 잘못 돌본다든지, 가족 간의 시간을 너무 많이 희생해서 가족과 관계가 서먹해진다든지 하는 경우는 개인의 행복에 큰 위해가 되기도 한다. 


최고의 남성상: 돈 잘 벌어오면서 가정일도 잘 도와주는 남성

최악의 남성상: 돈 잘 못 벌어오는 남성


최고의 여성상: 집안일 잘하고 내조 잘하는 여성. 수입은 적지만 돈도 벌어오는 여성

최악의 여성상: 집안을 돌보지 않는 여성


3. 권위 경쟁형 부부

남성에게 억압되어 왔던 여성의 권위가 상승하면서 권위의 우위를 위해 경쟁하는 부부


보통 억압되어 있는 사람들의 꿈은 억압하는 자와 평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과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당해 온 억울함을 상대방이 느끼게 하고 싶어 한다. 사실 억압받는 입장에서는 평등한 관계는 상상하기가 힘들다. 평등한 관계가 되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언제든지 다시 억압받는 관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대 이후에 우리나라는 복지가 크게 확충되면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많이 생겼고 젊은 여성뿐만 아니라 경험 있는 여성도 필요로 하는 전문적 직업이 많이 늘어났다. 남성과 완전히 동등한 수준의 보상은 아니지만 상당 수준 가정에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났다. 때에 따라서는 여성의 경제적 기여가 더 커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자유는 가정 내에서의 성역할의 변화를 요구했다. 문화적 역사적 물리적 약자인 여성이 이러한 기회에 선택할 수 있는 역할은 두 가지가 있었다. 평등한 관계를 새로 정립하거나 역전된 관계를 만들어서 여성이 남성을 억압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여성을 동등하게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이고 남성이 지금까지 가져왔던 주도권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저항하려는 상황에서 역전된 관계는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러한 관계에서는 “결혼 초반에 기선을 제압해야 해", “공처가가 되면 안 돼", “고개 숙인 중년의 아버지들"이라는 말이 오가곤 했다. 남성 상위의 야만적 가정 내 권력이 끝나가는 시대였지만 권위의 역전은 새로운 싸움을 초래할 뿐이었고 부부가 함께 협력해서 가정을 만들어 가는 모델과는 거리가 있었다.


최고의 남성상: 가정적이고 집 안팎에서 일 열심히 하는 남성

최악의 남성상: 부모세대의 남성 상위의 권위에 집착하는 남성


최고의 여성상: 사회적 경제 활동을 하는 여성

최악의 여성상: 가정에서 새로운 권력자가 되기 위해 투쟁하는 여성


4. 가정이 자아실현의 수단이 되는 부부

남녀가 완전히 동등하게 인식되지만 가정이 최우선 순위는 아닌 부부


30대 중반의 프로페셔널들이 있다. 연봉도 많고 일도 많고 바쁘지만 사업상 만나는 사람도 많고 친구들도 많다. 결혼을 안 하거나 이혼한 친구들도 많아서 크게 외로울 것도 없다.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던 일을 하고 있다. 자아실현까지 이룬 것이다. 


이들은 이미 5차 욕구까지 모든 욕구가 충족된 삶을 살고 있다. 바쁘긴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결혼해서 더 행복해질 일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이제 이들에게는 두 가지 리스크가 있다. 노년에 외로워질 리스크와 결혼에 실패해서 불행해질 리스크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하면 사실 삶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혼자 살다가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그냥 혼자 죽음을 향해 사는 상황은 꽤나 쓸쓸하다. 특히 대부분의 친구들이 결혼을 선택한 경우에 더 그렇다. 앞으로의 세대에 비혼 인구가 많아져서 그들 간의 커뮤니티를 이루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20대나 30대 초반의 경우 커리어를 쌓는데 바빠서 미래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비혼을 생각한다면 커리어가 좀 여유로워질 수 있는 40대 이후의 삶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은퇴할 때까지 엄청나게 바쁘기 때문에 걱정을 안 해도 될 수도 있지만 앞으로 노동시간이 짧아지는 이른바 4차 산업 혁명 사회에서는 비혼의 리스크는 남는 시간만큼 더 커질 수도 있다. 


혼자서도 사회에 자리를 잘 만들고 자아실현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결혼이 새로운 자아실현이 되지 않는다면 리스크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충분히 사회적 활동을 통해 행복한 사람들의 경우 결혼은 어디까지나 선택 사항이고 커리어를 가정과 결혼보다 우선한다면 커리어를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결혼은 각자의 커리어와 꿈을 이루는 데 리스크가 될 수도 있지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결혼을 통해 인맥이 더 늘어날 수도 있고 배우자와 재산을 합치게 되어서 재산이 늘어날 수도 있다. 또한 서로가 커리어의 조언자가 되어줄 수도 있다. 


4번째 부부의 모습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가정을 수단으로 삼는 경우이다. 각자의 사업, 직장, 연구 등을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면서 가정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가정이 최우선이 아니기 때문에 가정 내에서 해야 하는 설거지, 빨래, 육아 등은 귀찮은 일이 된다. 그래서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부부간에 규칙을 정해서 일을 나눈다. 


커리어를 우선하는 부부에게는 아이를 낳는 일은 큰 희생으로 여겨진다. 다음 세대 인류의 발전과 우리의 유전자를 남기고 아이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또는 우리의 성취를 나누기 위해서 등등 아이를 낳는 이유는 많지만 그것을 위해서 커리어를 희생하면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이 세대에 와서 워크 라이프 밸런스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더 이상 일이 생존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사회 내 소속감이나 사회 내 구성원으로서 존경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서 일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정에 들이는 시간과 커리어에 들이는 시간은 나의 선택이 된다. 


최고의 남성상: 가정일에 협조적인 전문직 남성

최악의 남성상: 일만 하고 가정은 돌보지 않는 남성


최고의 여성상: 가정일에 협조적인 전문직 여성

최악의 여성상: 일만 하고 가정은 돌보지 않는 여성


5. 가정이 자아실현의 목적이 되는 부부

남녀가 완전히 동등하게 인식되고 가정이 서로에게 최우선 순위인 부부


전문직을 가진 30대 중반의 남성과 여성. 앞에서와 같이 이들은 결혼이 더 이상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다. 결혼을 안 하고도 자아실현까지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주변에도 그러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싱글들끼리의 커뮤니티도 충분히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가까운 미래, 미국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현실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결혼이 꼭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앞에서 본 네 번째 가정은 결혼을 수단으로 삼아서 사회에서 성공하는데 도움을 주는 두 번째 우선순위로 만들었다. 또 다른 선택은 결혼을 목적으로 삼고 사회에서의 성공을 가정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가정이 무엇보다도 우선이 되고 가정에 문제가 있을 경우 일을 하러 간다는 것은 아예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회 구조와 가족의 모습이 이미 1990년대 이후에 정착된 미국에서는 “Family First”라는 말을 많이 한다. 가족이 일보다 무조건 우선한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은 물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몸이 안 좋아도 회사를 가기보다는 가족 구성원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가정이 목적이 되면 부부가 우선이 되고 가정에서의 일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된다. 설거지와 빨래는 회사일보다 중요해지고 부부간의 행복과 존중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해진다. 돈을 버는 것도 회사 일을 하는 것도 모두 가정을 위해서이다. 우리 가정의 행복에 회사가 도움이 안 된다면 회사를 옮기거나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또한 부부간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면 이혼도 자연스러운 선택이 된다. 행복한 가정 자체가 목적이고 서로의 자아실현의 과제인데 배우자와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없다면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논리적 귀결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는 부부가 많아지면서 사회 분위기도 바뀌면 이혼은 불행한 가족을 해체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가정이 목적이 되면 가정에서의 기대치가 사라진다. 수단에는 기대치를 부여할 수 있지만 목적에는 기대치를 부여할 수 없다. 내가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자동차를 출퇴근이나 여가 생활을 위한 이동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잘 달리고 잔 고장 없는 것이 기대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차가 고장 나거나 하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반면 자동차에 깊은 애착을 가져서 자동차가 목적이 되면 차에 대한 기대치는 없어진다. 고장이 나면 수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하는 이 자동차가 더 멋있게 보이고 오래오래 잘 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자동차를 통해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 자동차가 오래오래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닦고, 기름치고, 수리하는 일은 소중한 일이 된다. 


가정도 수단이 될 때에는 내가 집에 들어가면 저녁을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충분히 휴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등 많은 기대치가 생기고 그러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화가 날 수 있다. 그래서 “집이 왜 이렇게 어질러져 있어?”, “애들이 왜 이렇게 싸워?", “밥이 왜 이렇게 맛이 없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정이 목적이 되면 그러한 기대치가 사라지게 되고 가정의 모든 문제는 즐겁게 해결할 수 있는 최우선 가치가 된다. 집이 어질러져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쓸고 닦게 되고 아이들이 싸우면 아이들이 왜 싸울까, 어떻게 하면 가정의 문화를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싸우지 않도록, 또는 싸우면서도 성숙해 갈 수 있도록 도울까, 밥이 맛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우미를 불러야 할까, 나가서 사 먹어야 할까, 요리 공부를 해야 할까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가정을 목적으로 대하는 부부에게는 두 사람이 모두 가정의 주인이다. 남성의 입장에서도 여성의 가정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 가정의 일을 내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회사의 일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부부는 서로에 대해 기대치가 없기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다. 여성이 가정을 맡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출산을 제외하면 서로의 일상과 역할이 다를 이유도 없다. 함께 일찍 퇴근해 저녁을 함께 보내고 삶을 채우기 위해 아이를 낳아 기른다. 


이러한 부부상은 우리나라에는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다. 각각의 부부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혼의 목적은 사회적 성숙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가정을 안과 밖으로 나누어 각자 역할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에서 저녁을 즐기고 가정을 직업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최고의 남성상: 가정을 최우선에 두는 남성

최악의 남성상: 가정을 최우선에 두지 않는 남성


최고의 여성상: 가정을 최우선에 두는 여성

최악의 여성상: 가정을 최우선에 두지 않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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