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데이터, 시스템의 새로운 정치 체제
정보기술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민주주의 정치를 진일보시켰다. 소셜 네트워크 시절 이전에는 소통에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게 컸다. 신문 지면에 광고를 내야 했고 언론사의 기자들이 직접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이상 이야기를 전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등장으로 소통에 들어가는 비용은 이전에 비하면 0에 가까워졌고 민주주의 사회의 혈액과 같은 의견의 소통은 자유롭게 순환되기 시작했다.
언론의 일방적 소통을 벗어난 다자간 소통은 중동의 재스민 혁명, 대한민국의 촛불 혁명, 홍콩의 우산 혁명 등 수많은 정치적 혁명을 촉발하였다. 이전에는 주요 언론을 장악하면 마음대로 반민주적인 독재 정치를 할 수 있었지만 소셜 네트워크는 끊임없는 감시와 소통의 역할을 하며 시민들에게 정치적 힘을 부여해 주었다.
그런데 아직 시민사회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기록과 통계이다. 우리의 소통은 모두 기록되고 있지만 현재에 소비될 뿐 분석되어 통찰력을 얻는 것은 아직까지는 정치권력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민주연구원, 자유 한국당의 여의도 연구소, 그리고 미국에서는 오바마를 당선에 이르게 했던 빅데이터 분석 팀이 있었다. 이들은 국민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데이터를 모으고 조직화하여 선거에 활용하고 여론의 형성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아직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고 국민 전체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설문조사와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일부 정치권력만이 가진 도구이다. 시민들에게는 언론을 통해 해석과 함께 공표되는 여론조사 결과가 주어질 뿐이며 한 순간에 소비될 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정치 데이터가 없다. 내가 언제 어떤 정치인에 실망했었는지, 나의 어떤 현실들이 어떤 정치세력을 선택하게 하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없이 선거 때 이슈와 분위기에 따라 나의 선택이 좌우되곤 한다. 극단적으로 이 현상은 일부 권력자들에 의해 냄비 근성, 시간이 지나면 잊고 마는 개돼지 같은 존재 같은 시민에 대한 조롱으로 돌아오곤 한다. 지난 대선 때에는 공약과 나의 현재 정치적 선호를 매칭 한 심리테스트 같은 서비스가 등장해 지금의 내가 누구를 선택하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였지만 현재의 나를 보는 데이터일 뿐 축적된 데이터가 주는 인사이트는 얻을 수 없었다.
기초체력이 없는, 즉 역사와 깊이가 없는 현재만 있는 소통의 부작용은 “가짜 뉴스"와 “댓글 조작"으로 나타났다. 지난 수년간 무슨 비리를 저지르고 시민들을 속였든지 간에 프레임 하나만 잘 짜서 선동하면 판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이명박 정부의 공무원과 군을 동원하고 국정원까지 동원한 댓글 조작이 그 예이고 현재도 유튜브와 포털 뉴스 댓글, 커뮤니티 게시판 등을 통해 그러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짜 뉴스를 팩트 체크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과 전문성이 요구되고 사람들은 대부분은 가짜 뉴스가 제공한 뉴스 제목의 강한 인상을 기억할 뿐 팩트체크를 찾아볼 시간은 없다.
그래서 시민이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플랫폼이 필요하다. 내 생각들을 입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하고 종합적으로 변화하는 여론을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툴이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어떠한 요소가 변화를 이끌었는지를 쉽게 보여주는 툴이다.
정치 데이터 플랫폼이 시민사회에 줄 수 있는 힘은 다음과 같다.
1. 버블 밖을 보기
현재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알기가 정말 어렵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같은 뉴스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는 댓글만을 보게 된다. 데이터 플랫폼을 통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전체의 몇 퍼센트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2. 나의 기록을 남기고 보기
내가 언제 무슨 일로 대통령에게, 국회의원에게, 특정 정당에게 실망했는지, 또 어떤 사안에 대해 과거에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를 볼 수 있다.
3. 1차원적 정치관을 깨기
정치는 좌, 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은 매우 입체적이다. 북한과는 평화 공존과 협력을 하고 싶지만 집값은 올랐으면 좋겠고 노동자들은 더 좋은 권익을 누렸으면 좋겠고 스타트업계가 대기업보다 더 활발했으면 좋겠는 사람을 대표해 줄 수 있는 정치세력은 없다. 이런 사람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도도 아니다. 데이터를 이용하면 사람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좌우가 아니라 여러 형태로 보여줄 수 있다. 2차원 지도에 표시할 수도 있고 3차원 공간에 표시할 수도 있게 된다.
4.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나와 정치적 입장이 비슷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메시지를 보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세력화도 가능해지면서 다양한 정치적 이익관계를 공유하는 시민 결사체의 기초가 될 수 있다.
5.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정치인을 만나고 후원하기
지금까지는 지역(지역 대표)과 직능(비례 대표)과 정당으로 나의 대표자를 찾아왔다. 그렇지만 그 대표자가 내 마음에 맞는 법을 입안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국회의원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하는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으면 나와 맞는 사람을 찾아 법의 입안에 영향을 줄 수 있다.
6. 대통령에게 청원하지 않기
대통령 청원 사이트는 문재인 정권 이후에 소통과 여론을 조직화하는 창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시민이 선출한 대표일 뿐 청원을 들어주고 시혜를 베푸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군주가 아니다. 대통령 청원 사이트에서 민주적인 소통이 조직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 역할을 하는 곳이 행정부인 청와대인 것은 어색한 일이다. 오히려 국회나 정치권력 밖의 시민 사회가 해야 할 일이다.
386세대는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서 정치를 하고 있고 그것이 지금의 시대정신이 되어 있다. 그동안 정말 나쁜 의도를 가지고 폭력적 정치를 해왔던 기존 세대에 반발하여 학생운동으로 일어났던 386세대의 정신은 지금 정권을 잡고서도 힘든 싸움을 하고 있지만 정치권력의 왜곡된 사용에서의 전환을 이루어내고 있다.
그렇지만 정의의 정치는 우리나라 정치적 발전의 과정일 뿐 종착점이 될 수는 없다.
개발도상국에서는 한 방향으로 가면서 그 방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국가 발전의 모델이다. 없는 살림 짜내서 소 팔아서 첫째만 대학 보내던 시절처럼 자원이 부족할 때에는 일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대기업에 몰아주고 정경유착으로 국가를 발전시키는 정책을 했었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희생이 돌아왔다. 지금은 첫째만 대학을 보내고 나머지 자식들은 희생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모든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서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야 하는 시대이다. 국가 경제에서도 대기업만 몰아주어야 잘되는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작은 기업들과 개인들이 더 큰 경쟁력이 될 수 있고, 제조업보다 문화 산업과 미디어, 소프트웨어 등이 더 큰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첫째에게 몰아주는 정책은 분명 그 시대에는 필요했던 정책이었지만 상황이 달라진 지금은 바로잡아야 할 반민주적 적폐이다.
그렇지만 적폐가 청산된다고 해서 정치가 완벽하게 잘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공백을 채울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제왕적 대통령제 이후에는 어떠한 시스템이 우리나라 정치에 자리 잡아야 할까? 막연히 정의로운 민주주의는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개발도상국일 때의 정치와 달리 더 이상 우리의 정치는 누가 옳으며 누가 민족의 앞날에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을 위해 하면 안 된다.
택시와 공유 경제, 누가 옳을까? 누가 우리 민족의 앞날에 더 도움이 될까?
개발도상국일 때 같으면 공유 경제가 미래이니 택시는 희생하라고 할 수도 있고, 정부가 그런 시책을 만들면 언론이 나서서 택시업계를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국가의 미래에 방해가 되는 세력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서는 그러한 질문 자체가 성립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 다 경제 발전을 해야 한다고 했던 민족의 사명이 하나로 일치되던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문화 발전, 소프트웨어 발전, 경제 발전, 정치 발전, 국가 안보, 종교 발전 등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하는 시대이고 각 사람이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가치관은 너무나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민 경제를 우선하는 사람에게는 택시 기사분들의 노고와 어려운 삶이 눈에 들어올 것이고 스타트업을 활성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공유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울 것이다. 또 택시 서비스에 불만을 느꼈던 시민들은 택시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택시 회사 사장들과 또 택시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이해관계를 지키면서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을 들이대는 것은 의미 없는 극단적인 투쟁만을 부를 뿐이다.
이해관계를 해결하려면 선악의 개념을 떠나 솔직할 수 있어야 한다. 건물 가진 사람은 사회적 비난을 받지 않고 "난 임대료가 올랐으면 좋겠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굳이 그게 나쁜 생각인 양 숨기면서 꼼수를 부리면서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또 세입자는 피해자로 절규하지 않고 "난 임대료를 내렸으면 좋겠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립에 각 개인이 합리적인 입장을 갖고 문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1. 비대칭적인 언론 권력을 이미 존재하고 있는 SNS 등을 통해 시민의 권력으로 가져와 자유롭게 의견 개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2. 단순한 여론 몰이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 따른 합리적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쌓여 있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3. 그리고 그 솔직한 이해관계를 풀어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을 이해하고 다수결의 원칙이든 돈의 원칙이든 숙의제이든 어떤 규칙을 세워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미국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이해관계를 돈의 논리로 해결해왔다. 그래서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은 별로 없고 정치 세력에 따른 폭거도 쉽지 않지만 총기 규제같이 돈이 있는 집단의 이익을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나갈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우리나라 다음 세대에는 어떤 정치가 필요할까? 정치적 악과 싸우던 시대를 벗어나 모두가 동일 선상에서 시작해야 하는 시대에는 어떤 정치가 필요할까?
SNS를 통한 소통의 권력, 정치 데이터 플랫폼을 통한 지식의 권력, 그리고 언젠가 국회에서 만들어주길 바라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는 이해관계 해결의 시스템. 이 세 가지 요소로 각 국민들은 자신의 입장과 가치관에 맞게 의견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며 의사결정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여 의사결정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관찰한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고 각자의 역할에 따라 입장을 정하고 권위 없이 활발히 토론하고 독단적 결정이 아닌 Community Decision Making을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입장과 역할을 가지고 결정의 주체가 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소통의 권력을 얻었다. 이제 데이터 권력을 얻을 수 있으면 다양성의 시대의 의사 결정에 필요한 자신의 입장을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자연히 다양한 입장의 대립을 풀어낼 수 있는 국가적 의사 결정 시스템이 필요해지고 만들어지고 작동하지 않을까?
지금의 데이터 없는 소통만으로는 낙인찍기와 적대시밖에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름을 바로잡던 촛불의 시대를 넘어 다음 세대의 정치는 데이터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시스템을 통해 함께 의사 결정을 하는 대한민국만의 선진적 정치 체제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