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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현 Dec 08. 2019

뛰지 않고 걷는 삶

변화의 시대를 사는 방법

사회가 길을 정해주던 시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산업화 시대는 치열한 경쟁을 특징으로 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도태되었다. 성공의 공식은 단순했다. 삶은 대략 두 번 정도의 큰 시험으로 이루어졌다. 대학 입시와 직업을 정하는 시험. 대학 입시에서 좋은 대학에 가는 순서로 누군가의 삶은 편해졌고 누군가의 삶은 어려워졌다. 직업을 정하는 시험은 국가고시, 대기업 공채 시험, 공무원 시험, 중소기업 입사 시험, 또는 대학원을 가는 시험 등이 있어왔다. 그리고 어떤 20대에 시험을 택하는지에 따라 삶의 여정이 정해졌다.


삶의 여정이 정해지고 나면 남는 것은 달리는 일뿐이었다. 사회가 정해준 코스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그 길을 빨리 달리면 승자였고 느리게 달리면 패자였다. 아주 단순하게 모든 사람을 달리게 만드는 이 시스템은 우리나라를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변화의 시대, 달리던 길이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사회가 정해준 코스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시작했다. 신기술이 나왔다고 직업이 없어지고 기업이 없어지고, 정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교육이 변했다. 삶의 가치관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계속 달리던 사람들이 어디로 달려가야 하는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물론 변화하지 않은 코스들도 있었다. 공무원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가장 변화에 느리게 반응하는 조직이니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평생 어떤 코스로 가면 급여를 받을 수가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줬다. 옛날에는 대기업에 들어가면 코스가 정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점점 깨어지고 있다. 아직 잘 나가는 일부에게는 그들이 가던 코스 그대로 가면 되었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대기업조차도 안전한 길을 제공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 옛날 길을 아직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변화하는 길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자괴감과 혼란에 빠져버린다.  


'나는 왜 저들처럼 달리지 못할까?'


'그래 마음을 다잡고 다시 달려보자.'


'그렇지만 달릴 수가 없어. 이미 저들에게는 탄탄대로가 주어져있지만 나에게는 저런 길이 없어.'


그렇지만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따라 달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의 새로운 방향과 속도를 찾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


포장도로의 끝에 다다랐다.


지금까지 개발도상국에서는 가는 길이 명확했다. 모든 산업화를 거친 선진국들이 닦아놓은 길이다. 미국이, 일본이, 독일이 닦아놓은 그 길을 벤치마킹하면서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기술 혁신이 가속화되면서 산업 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변화가 오면서 기존의 길들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더 이상 이전의 고속도로 같은 길에서 빨리 달리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 만으로는 내가 원하는 삶을 지지할 수가 없어졌다. 이제부터는 누가 닦아놓은 길을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 그리고 여러 선진국들. 모두가 비슷비슷한 경쟁을 하던 산업화 시대의 개발도상국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겉에서 볼 때 느리고 각자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들 나라에 가면 그들의 느린 속도에 답답할 지경이다. 그리고 중국에 가면 그 변화의 속도에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중국은 우리가 간 길 보다 더 잘 포장된 길을 달리고 있다. 우리가 한번 더 포장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포장된 도로의 끝에 다다랐다.


이젠 우리만의 길을 찾아야 할 때이다.


걷는 것이 유리해졌다


우리는 새 길을 만드는 나라들은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앞서 나아가는 나라들이니까. 그리고 이제 우리도 그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제 우리도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허허벌판 같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나아가야 한다.


산업화 시대에는 걷는 사람은 게으르고 도태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가는 길이 명확하지 않은 비포장도로에서는 다르다.


포장도로가 끝난 막막한 벌판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최소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얼마나 빨리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가, 즉 유연한 방향의 변화이다. 포장된 도로와는 달리 가 본 적이 없는 벌판에서는 나를 강이 가로막을 수도 있고 돌이 가로막을 수도 있다.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가는 방향을 응시하면서 다른 경로를 찾기도 하고, 또는 처음에 목적한 방향을 바꾸기도 하면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정한 목적지가 최선의 목적지라는 보장 조차 없다. 끊임없이 살펴보면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 아닌 길이다.


이러한 곳에서 달리면 방향을 바꾸기가 너무 어려워진다.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너무 멀리 와 버린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래서 변화의 시대에 달리는 사람은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삽질을 많이 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변화를 해야 할 때 가장 멀리 돌아와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 대신 한발 한발 방향을 바꾸면서 신중하게 나아가는 사람은 천천히 가고 여유롭게 가지만 오히려 가장 멀리 갈 수 있다. 변화에 계속 적응하면서 가면 세상이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루트를 더 빨리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애자일"이다. 변화에 민첩하게 적응하면서 방향을 바꿔 나가는 것은 달릴 때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민첩"은 방향 전환의 민첩성이지 달리는 속도의 민첩성이 아니다. 천천히 가면서 늘 온 길을 돌아보고 우리가 가려고 했던 방향을 바라보면서 방향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애자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사람보다 훨씬 느릴 수 있지만 더 좋은 곳에 오히려 더 먼저 다다를 수 있다. 어디에 가야 세상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니까.


달리지 말고 걸어야 할 때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달리지 말고 걸어야 할 때가 왔다. 달리지 않고 걷는 것은 게으르게 산다는 뜻이 아니다. 내 에너지를 쓰는 방법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서 주변 환경의 변화를 판단하고 나만의 유니크한 길을 만들어 가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그런 예는 우리 주변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기존 문법을 벗어나 없던 것을 새로 만든 사람들.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본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만 해도 수도 없이 많았다. 최인아 책방, 무경계 북살롱, 다독다독 팟캐스트, 트레바리, 태용, 펭수, 김기사 랩, 스타일쉐어, 주렁주렁, 글린공원, 공게임즈,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에어비앤비, 우버, 유튜브 등등.


이러한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지만 시장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하루아침에 사업이 위축될 수도 있다. 견고한 자본금과 사업 기반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제껏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그 제공한 가치에 대한 보상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러한 유니크함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기존 경쟁이 치열한 산업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능가해가고 있다. 미국 경제는 이미 실리콘밸리가 견인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고, 한국의 새로운 경제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스타트업들에서도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스타트업들은 기존의 문법으로 접근하는 법과 사회의 반응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 변화는 불안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늘 겪어야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가만히 놔두어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심하게 변화를 두려워하고 틀어막으면 그만큼 '잃어버린 시간'들이 우리에게 올 수도 있다.


걷는 것은 불안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한 변화의 시대에 가장 "애자일"하게, 즉 민첩하게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전한 방식이다.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스스로 끊임없이 방향을 수정해야 하는 비포장 도로에서는 뛰는 것이 훨씬 더 불안하다.  


오히려 지금 뛰고 있는 친구들이 지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달려왔나를 고민하고 있을때 위로를 해 주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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