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생긴 성 역할의 충돌
요약: 남녀 평등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시대적 전환을 거친다고 생각한다.
1. 여성 착취가 필요했던 시대
2. 여성 착취가 관습화 되었던 시대
3. 여성 착취 금지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었지만 문화로 남은 시대
4. 여성 착취 문화에 대한 자각이 생기는 시대
5. 남/녀 그룹적 평등에서 벗어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 개체로 받아들여지고 평등하게 대우받는 시대
우리는 3번에서 4번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남녀 차별과 갈등의 극복은 제로섬 게임의 싸움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유니크한 존재로 인정하고 개인에 맞추어 배려해 주는 다양성(diversity)의 시대에 가능해 질 것이다.
과거에 남성이 국가의 근간이고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때 남성은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켰으며, 교육을 받고 법관이 되었으며, 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며, 회사원이 되어 산업 역군이 되었다. 사회의 거의 모든 일을 남성이 해냈고, 그 일은 고되고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하고 출산과 육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은 주로 가정을 돌보고 남성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고된 노동과 희생으로 나라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는 남편에게 식사과 편안한 휴식처를 마련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었다. 그 또한 엄청나게 고된 일이었지만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남성 생각하며 운명이려니 하고 살았다. 모두가 그렇게 살았으니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거의 모든 사회생활을 남성이 하다 보니 사회는 남성의 문화 위주로 돌아갔다. 여자 화장실이 없는 곳은 군대뿐이 아니었다. 대학교 공대에도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 회사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다니기 적합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군대식 용어와 예절로 주로 소통했다. 야근이 일상이어서 여성에게 회사 생활은 적합하지 않았다.
국가를 위해, 회사를 위해 녹초가 되도록 헌신한 남편들이 가정에 돌아왔을 때 가정에서 쉴 수 없으면 정말 화가 났다. 그래서 가정이 제대로 쉴 준비가 되어 있으면 집에서 자기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여성과 아이들에게 화를 내곤 했다. 그러한 언어 또는 물리적 폭력도 그의 국가에 대한 희생 때문에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상은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일제 강점기에도 그랬고, 산업화 시대에도 그랬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사회진출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고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 끝에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이제 국가를 위해 밤낮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이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단순 노동은 임금이 저렴한 후진국으로 넘어갔고,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높은 교육 수준과 전문성을 갖게 되었다.
고급 교육을 받고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단순 노동을 하면 국가적으로 손해가 되고 개인적으로도 손해가 된다.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노동과 야근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여 창의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창의적인 건축물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고, 혁신적인 금융 상품과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남들이 생각해 본 적 없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서는 필요하다.
더 이상 산업이 고된 육체노동이 아닌 화이트 컬러의 지식 노동이 되면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수준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사회적 선입견과 가정에서의 관습적 역할을 제외하고 순수 업무 능력으로만 비교했을 때 그러하다. 남성도 아이를 볼 수 있고, 여성도 일을 할 수 있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고정관념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이제 남성과 여성의 구분 없이 개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창의적이고 다양한 개인의 기여는 국가 경쟁력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아실현과 행복에도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사회는 아직 국가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남성만 일을 하는 것을 가정하고 만든 사회체제는 아주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경제 구조는 여성의 참여를 원하고, 여성도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여성도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는데 사회는 아직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에 진출을 하고 싶으면 여성은 육아와 가정을 돌보면서 회사 생활도 해 내야 한다.
청년의 90% 이상이 대학을 가는 사회에서 대학 교육을 마친 여성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싶고 기여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결혼할 때쯤 되어 여성은 사회생활을 계속하고 싶으면 셋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1. 결혼을 포기한다.
2. 결혼을 하면 출산을 포기한다.
3. 출산까지 하게 되면 육아, 가사, 회사 일을 다 해내는 슈퍼우먼이 된다.
출산을 하지 않으면 국가 전체의 장래는 위험해진다. 그리고 개인 차는 있겠지만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 행복을 느끼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인간에게 출산과 가정을 포기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대학을 나온 전문인력이 아이를 낳고 자아실현을 포기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너무 불행한 일이며 사회적으로도 손실이다.
이 뿐만 아니라 남성이 사회에 더 의미 있는 기여를 한다고 여겨졌던 시대에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여성 착취의 권력 - 성적 대상화, 성범죄에 대한 경미한 처벌, 여성에 대한 무시 - 등은 여전히 사회에 남아있다.
이것이 “82년생 김지영”이 담담하게 그려낸 국가 중심 산업화 시대에 태어나 개인의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도기에 남성들도 억울하다. 남성들은 군대도 갔다 오고 힘든 사회생활을 하면서 야근도 하고 술자리도 가야 한다. 그런데 사회가 변화하면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역할이었던 가정을 돌보는 일을 등한시하고 직업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남성들도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1. 아내는 나에게 가정을 돌보고 육아에 참여하기를 원하지만 회사는 나에게 가정을 돌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2. 여성들이 나의 경쟁 상대로 추가되어 취업은 더 어려워졌다.
3. 옛날에 남성들만 돈을 벌었을 때에는 데이트 비용을 남성이 내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지금은 여성도 돈을 벌면서 관습은 많은 경우 그대로이다. 그래서 연애하기도 힘들다.
이렇게 되면 정말 화가 나기 시작한다. 여성들은 남성들은 당연히 따르도록 강요되는 문화를 따르지도 않으면서 대우는 똑같이 받길 원한다. 그러면서 데이트 비용이나 결혼 비용 등 사회적으로 남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부분은 여전히 그대로다.
개발 도상국 이전 시대의 개인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매슬로우의 피라미드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생리, 안전 욕구는 국가가 없으면 크게 위협받는 욕구이다. 집도 없고 전쟁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나를 지켜줄 국가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나를 희생해서 주변 사람에게 국가를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크게 가치 있는 일이 된다. 국가가 없었던 일제시대, 그리고 국가가 실질적인 기능을 못했던 1970년대 이전 시대에는 그래서 독립운동도 하고 국가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 많은 희생을 하였으며 그 고비마다 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다.
개발 도상국이 되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사회에서의 존중감, 명예를 찾게 된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모아서 존경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강의를 잘해서, 어떤 사람은 사업을 잘해서 존경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존경과 명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런데 선진국이 되어서 4단계까지의 모든 욕망을 사회가 해결해 주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돈에 집착할 필요도 없어지고 명예를 위해 과시할 필요도 없어진다. 옛날에는 돈이 없으면 절대 빈곤이었고 돈이 있으면 안전하게 살 수 있었지만 요즘은 돈이 없다고 굶어 죽는 일은 거의 없다. 가정이 도와주고 국가가 도와준다. 명예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될 필요는 없다. 바로 자아실현의 세대가 오게 되는 것이다.
자아실현의 세대는 각자가 자기가 타고난 것을 잘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면서 사는 세대이다. 한편 어른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 하는 세대이다. 생존을 위한 돈이 너무 중요해서 회사에서 어떤 가혹한 일을 시켜도 꾹 참고 일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것은 지금 우리 세대가 먹고 살 걱정하지 않고 차별받고 무시당하지 살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국가의 시대에는 개인을 표준화된 집단의 일원으로 보았다. 그래야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인력을 원하는 사회는 사람들을 성별로 나누고 표준화에 적합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줄을 세운다. 공부 잘하고, 야근할 수 있는 체력을 갖추고 사회생활을 잘하는 남자 집단은 표준에 들어가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덜 효용이 있는 사람으로 무시당한다. 여성은 아이를 잘 낳고 가정을 잘 돌보며 남편을 위해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표준이고 그 표준과의 거리로 평가받았었다.
자아의 시대에는 모든 개인이 각각의 유니크한 존재로 인식된다. 어떤 사람은 아이가 있고, 어떤 사람은 배우자가 있고, 어떤 사람은 외국인이고, 어떤 사람은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 안 좋고, 어떤 사람은 천재적이고, 어떤 사람은 사회적이지 못하다. 모든 사람이 각자 타고난 부분이 있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부분, 못 하는 부분이 있다.
표준화된 인력이 필요한 국가의 시대에는 이러한 개인의 특성이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개인의 시대에는 이러한 개인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경제 체제가 되어야 경쟁력을 갖는다. 표준화된 인력은 이미 다른 개발 도상국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남녀의 문제가 성 대결이 아닌 개인의 특성 차원이 된다. 집단의 시대에는 생리 휴가 같은 것이 문제가 된다. 모두 다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을 안 하고 월급은 똑같이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개인이 모두 연봉을 다르게 받고 역할도 각각 다른 체제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이 몸이 아프든, 생리 휴가를 쓰든, 가족과 여행을 떠나든, 아이를 돌보느라 회사에 못 나오든 회사에 계약한 일만 해 주면 된다.
또 다른 예로 여성이 돈을 벌고 남성이 육아를 담당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가 국가란 이름의 관습으로 성별에 따른 특정 역할을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을 개체로서 존중할 때, 이 모든 것이 개인과 각 가정의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각 개인을 다르게 대우하고 각자의 특성을 다르게 배려하는 사회가 되면 성 대결의 문제, 인종 차별의 문제, 외국인 혐오 등의 문제는 자연히 완화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실리콘밸리에서 본 역할 조직에서 이러한 실마리를 찾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실리콘밸리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실리콘밸리에도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종 차별, 성 차별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트럼프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종 혐오 정서는 극에 달하고 있다.
표준화, 집단화와 개인화는 아무리 선진국이 되어도 어떠한 균형 속에서 계속 갈등을 일으켜 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처음 자아실현을 접하는 과도기보다는 훨씬 덜한 갈등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다. 우리나라가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 대신 경제적 문제가 많이 해결된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자아실현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특성에 따라 각 사람을 유니크한 개인으로서 배려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른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한 멋진 문화를 가진 나라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