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 조직과 역할 조직은 시작할 때의 환경이 다르다.
혁신에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역할 조직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누군가가 탁월한 식견으로 설계를 하고 직원들에게 적용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역할 조직은 전문가를 활용하기 위해 아주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위계질서가 중요한 제조업 기업이든, 전문적 역할 중심의 실리콘밸리 기업이든 처음에는 모든 직원이 존중받고 비슷하게 수익을 분배를 받는다. 5명 내외의 창업자들은 모두 다 회사의 주인이고, 회사가 대박 나면 그들 모두가 큰 수익을 올린다. 당연히 서로 존중하고 많은 것을 배려한다. 그런데 창업 다음 단계부터 제조업 기업과 하이테크 기업은 문화가 상당히 달라진다.
전통적인 제조업 기업은 많은 수의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전문가가 아니라 단순한 일을 반복하고 시키는 일을 잘할 사람이 필요하다. 특히 다른 많은 경쟁사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최소한의 임금으로 최대한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창업자들은 수천, 수만 명씩이나 되는 노동자들과 굳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오직 ‘착한’ 임원들만 직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착한 임원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해서,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바뀌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반면,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기업은 그 반대이다. 창업자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업 자체가 각 영역의 석사 이상의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스타트업의 창업자들은 자신의 프로덕트에 맞추어 자신보다 뛰어난 전문가들을 모셔온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지원자들을 면접하는 역할을 하는 직원들에게 늘 하는 말이 바로 “당신보다 뛰어난 사람만 합격시켜 주세요"이다. 내 다음에 들어올 사람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어야 한다. 나보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은 신규 입사할 수가 없다.
위계 조직에서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뽑으면 일 시키기가 어려워지지만, 역할 조직에서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뽑으면 그 사람의 역할까지 동료들이 대신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뽑으면 그 피해가 직접적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프로 축구팀에서 수비수인 내가 동료 수비수를 뽑는다고 생각해보자. 나보다 뛰어난 수비수를 뽑으면 내 수비가 훨씬 더 수월해지지만, 나보다 못한 수비수를 뽑으면 나도 힘들어지고 팀도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팀에 뛰어난 수비수가 너무 많아져서 내가 선발에서 제외된다면 그때는 다른 팀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역할 조직에서 이직이 잦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신입으로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들어오는 환경에서는 그들을 무시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매우 어색한 일이 된다. 모두가 뛰어난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최고의 수준으로 대우를 하고, 그들의 전문성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위에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입직원이어도 각 전문가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높은 연봉,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 집에서 일해도 되는 근무환경, 심지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원격근무를 하는 디지털 노매드(Digital Nomad) 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진다.
위계 조직에서는 정보를 제한한다. 위계 조직에서는 신입사원들은 아는 것이 가장 적은 직원들이고, 윗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알기 쉽게 전달해서 이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쉽게 해주는 대신, 정보를 제한하고 이를 통해 상대 우위의 지위를 유지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들어와도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어느 회사에서 경영자가 오라클과 데이터베이스 독점 계약을 체결했는데 직원들에게는 그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자. 뛰어난 엔지니어가 들어와 마이에스큐엘(MySQL)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훌륭한 프로젝트를 수행했어도, 경영자에게 가져가면 오라클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훌륭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큰 실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위에서 이야기해 준 대로만 일을 하게 된다. 사내 표준화된 방식으로만 일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의 전문성의 많은 부분은 낭비되고 말 것이다.
결국 정보를 다 개방하고 소통을 전방위적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을 뽑아도 그저 그런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
냉장고, 반도체, TV 등을 만드는 제조업에서는 정보의 공유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바로 설계자들이 따로 존재하고, 실제로 만드는 사람들은 설계를 그대로 따라 하면 되기 때문이다. 설계도는 아주 세밀하게 모든 부품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런데 소프트웨어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면 좋은 소프트웨어가 나올 수가 없다. 소프트웨어 최적화는 기획자가 미처 다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기획자가 아무리 설계를 잘한다고 해도, 뛰어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보면 다양한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조를 활용하여 더 빠르고 더 좋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는 최적화를 할 수가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UX 디자이너, 프로덕트 매니저들이 다양한 전문적 입장을 가지고, 제품에 대해 최적화를 하다 보면 제품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애초의 설계는 무시되기 일쑤이다. 그러면 기획자들의 노고는 금방 허사가 되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실리콘밸리 기업에는 기획자라는 직업이 아예 없다. 엔지니어 문화에서 출발한 실리콘밸리의 프로덕트 제작의 경우 처음의 설계를 구현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프로덕트를 가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설계를 하고 아래에서 그것을 구현하는 모델로는 실리콘밸리식 소프트웨어의 발전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게다가 그 과정이 아웃소싱을 통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아웃소싱 구조에서는 설계를 바꾸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이다.
회사가 무한경쟁 속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라면, 즉 안드로이드 앱처럼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한 앱을 만드는 회사라면, ‘기획자의 설계→개발자의 구현→피드백을 통한 개선의 사이클’을 빠르게 돌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제품이 끊임없이 진화하기보다 단계별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마치 사냥터에 나가서 한 사람은 사냥감을 눈으로 보고 쏠 시점을 결정하고, 한 사람은 시키는 때에 총을 쏘는 일만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면 효율적인 사냥이 될 리가 없다.
반면 기획자의 설계가 아닌, 엔지니어, 디자이너, 프로덕트 매니저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진화시켜나가는 애자일 방법론이 소프트웨어의 빠른 진화 사이클을 제공하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한다.
특정한 미션에 따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회사라면, 즉 혁신을 이루어가는 회사라면, 애자일 방법론에 더해 정보의 최대한의 소통이 필수적이다. 직원들이 전문가로서 매일매일 작은 결정들을 스스로 내리고, 나머지 팀원들과 꾸준히 소통하는 조직이 일하는 결과물이 혁신을 가져오기 쉽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내 전문분야에서 매일 최고의 프로덕트를 만들지 고민하는 경우에만 혁신이 최대화될 수 있다. 위의 한두 사람이 모든 결정권을 가진 경우에는 직원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없고, 전문가들이 이루는 혁신을 충분히 얻어낼 수 없다.
실리콘밸리의 기업문화는 모든 회사에 적용되어 최대한의 효율과 직원의 행복을 보장하는 체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기업문화가 제조업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처럼,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는 혁신을 이루어내는 소프트웨어 산업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직원들이 많은 연봉과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 일과 생활의 균형)를 갖게 된 것은, 세상을 바꾸어가면서도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실리콘밸리 체제의 좋은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