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돈가스 김밥과 라볶이를 먹을게요.
“그 영화 보러 갈래?”
나는 이미 두 번 본 영화였다.
그래도 “좋아”라고 말했다.
아니요라고 말하면 끝날 일이었다.
나는 그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나는 다시 처음이 된다.
이미 아는 장면에서 숨을 고르고,
옆 사람의 반응에 맞춰 웃는다.
끝나고 나면 감상평도 매번 달라진다.
상대가 감동하면 나도 감동했고,
상대가 별로라면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거절을 못하는 습관이었다.
나는 식사 메뉴를 먼저 고르는 법이 없다.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걸로 먹자.”
상대가 고르면 나는 바로 예스를 던진다.
내가 다른 걸 말하면 까다로운 사람이 될까 봐.
“너 먹고 싶은 걸로 먹자.”
그 말은 사실 “나는 없어도 된다”에 가깝다.
술자리 안주도 마찬가지다.
먼저 고르지 않는다.
누군가의 선택에 얹혀간다.
이제는 거절을 못하는 걸 넘어서
내 호불호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회사에서는 이 성격이 더 분명해진다.
회의가 끝나고 누군가 묻는다.
“이거 누가 할 수 있어요?”
잠깐의 정적을 못 견딘다.
나는 결국 “제가 할게요”라고 말한다.
남들이 한 번씩 미룬 일들이
조용히 내 자리로 쌓인다.
특히 사용자와 협업 일정을 잡을 때는 더 그렇다.
“괜찮으신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늘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정말 상대방 시간에 내 일정을 맞춘다.
그래서 내 달력에는
유난히 썼다 지우고 다시 쓰는 일정이 넘쳐난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걸 대충 못한다.
못 해내서 신임을 잃을까 봐.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릴까 봐.
최선에서 한 번 더 최선을 다한다.
그 결과물이 얼마나 수고스러웠는지는
대부분 금방 잊힌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걸 내가 했을 뿐이다.
나는 관계를 지키려고
내 선택을 뒤로 미뤘다.
갈등을 피하려고
내 생각을 삼켰다.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다가
나는 점점 흐려졌다.
거절을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를 확인하지 않은 채 대답해 온 게 문제였다.
나는 ‘괜찮아’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먼저 확인하기로 했다. 나를 지키려고.
나는 오늘 새로운 문을 열어, 안 하는 쪽의 반대편, 하는 쪽에 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