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곡으로 한 시기를 살았다
나는 출퇴근을 자차로 한다.
그리고 차는 스피커가 특화된 모델로 골랐다.
문을 닫으면 바깥소리가 끊기고, 감정만 남는다.
실내는 작고 단단해지고, 저음은 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나는 그 순간이 좋다.
뻑적지근하게 귀를 호강시키는 느낌.
혼자 타는 차 안에서 음악은 과하게 친절해진다.
어느 날 출근길에 한 곡에 꽂혔다.
Dean Lewis의 ‘How Can I Say Goodbye’.
아버지와의 이별 이야기다.
나는 별일이 없었는데도 반복재생을 눌렀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선 차 안에서,
어느 순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버지는 아직 멀쩡하다.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도 아니다.
어제도 통화했고, 평소처럼 밥을 드셨다.
그런데 나는
이미 떠난 사람처럼 울고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인생의 한 시기를
단 한 곡으로 채우는 습관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이별 직후에
V.One의 ‘그런가 봐요’만 몇 주를 들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 헤어진 연인이 내게 사과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헤어짐을 후회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돌아오기만 해 봐라.
내가 당장 용서해 줄 테다.
그때 유행하던 MP3 용량은 256MB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귀엽다.
하지만 곡 하나는… 대저택에 사람 하나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그 저택에 한 사람을 들이고, 문을 잠갔다.
그 뒤로도 비슷했다.
라디오헤드, 저스틴 비버, 브루노 마스.
김동률, 박원.
휘성, 선우정아.
나는 몇 번의 계절을 한 곡으로 살았다.
가사를 거의 다 외운다.
외우려고 한 적은 없다.
한 곡을 오래 틀면, 몸이 먼저 기억한다.
예전에는 실제 사건이 먼저였고
노래는 그 뒤를 따라왔다.
지금은 다르다.
별일이 없어도
나는 노래를 틀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차 안은 밀폐되어 있고,
스피커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 능숙하다.
가사를 빌려 장면을 만든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별을 미리 겪는다.
멀쩡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붙잡는다.
나는 감정이 많은 사람일까.
아마도 아니다.
나는 감정을 확대하는 사람이다.
반복재생은 확대 버튼이다.
한 곡은 렌즈가 되고
나는 그 안에서 슬픔을 키운다.
고인 물처럼 오래 붙들고
충분히 젖을 때까지 머문다.
생활은 망가지지 않는다.
다만, 장면이 조금 더 선명해질 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진한 감정에 오래 절여진 채로
나는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슬픈 노래를 오래 듣는 사람.
이별을 깊게 겪는 사람.
아버지를 미리 떠나보내는 사람.
그게 나라고 믿었다.
감정은 통과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 안에 오래 머물렀다.
한 곡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나를 더 나답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를 한 장면에 고정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명한 감정은 진짜 같아서,
나는 그 진짜 같은 것을 붙들었다.
하지만 선명하다고 해서
지금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오늘은 반복재생을 누르지 않는다.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서, 나는 운전한다.
나는 오늘 새로운 문을 열어, 안 하는 쪽의 반대편, 하는 쪽에 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