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지 않은 스타일의 카페였다. 비좁은 책상 위에 그녀는 노트를 꺼냈다. 책 한 권은 항상 지니고 다니다가 그때부터 노트와 필기구도가지고 다닌다. 그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나와 다르다는 건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속도를 가졌다는 의미다. 거부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는 처음 들어본 것들이었고, 나와는 전혀 다른 빠르기로 사는 사람이었다. 자본주의 첨병인 조직에서 일하던 나의 관심사와는 정 반대편의 이슈들을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신기했고, 경이로웠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되려 반대편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가 직업적으로 환경과 기후변화를 공부했어서 비주류였다고 떠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비주류 중에 비주류였다. 그녀는 주류의 정점에 있다가 지금의 삶을 선택했다고 했다. 극과 극의 세계로 입문하기까지 인생 내러티브에 빠졌다. 그녀의 언어에 설득당했다. 빠르기에 압도당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이런 관계를 멘토와 멘티라고 하더라. 그녀는 커피를 마셔도 커피 봉지를 뜯는 법, 커피를 봉지를 뜯고 처리하는 법, 커피잔을 고르는 법, 커피를 끓이기 위한 최적의 물을 선택하는 방법과 분량, 커피물을 따를 때 검지손가락의 위치까지 - 따지고 셈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 사람이었다. 불면을 달고 살았다. 난 그녀만큼 예민하고 영민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무거나' '괜찮아'를 달고 살았던 나에게는 신선하고 피곤한 사람이었다. 딱 잘라 정리해 보자. 그녀는 절대 친구하고 싶을 것 같은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인연이라니까.
분명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현실이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그녀는 그녀의 언어와 법칙으로 나를 그녀의 우주로 인도했다. 나는 그녀가 걸은 길을 따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나는 그녀의 길을 따라간 건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는 이상향에 매료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상주의자였다. 이상에는 세 가지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종국엔 선한 것이 이긴다라는 것, 선한 것은 주류가 아닐 확률이 크다는 것, 주류가 아닌 것들이 이기려면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진했다.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지 않고, 남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보고, 타인에게 의지 하기보다 스스로 강한 사람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문학을 탐독했고, 고전을 익히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선의를 베풀고자 했다. 그 사이 나는 다시 태어났다. 성격과 성향이 바뀌기도 했으니까.
3년 전쯤일 거야.
그녀를 만나기가 부담스러워졌다.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과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나는 가끔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느껴졌던 에너지, 말투, 단어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만남의 유통기간이 다 된 걸까. 내가 달라진 걸까. 봉인해 두었던 그녀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른 이유를 알겠다. 바로 이별이었다. 글쓰기 화두가 "나의 이별"이었는데. 나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던 그녀까지 생각이 이어져 온 것이었다. 사제의 정을 특별하게 여기던 나는 인간적으로 그녀가 싫었지만 그녀가 주는 마음에 화답하기 위해 마음을 온전히 내어 주었다. 기특하게도 배움을 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선의를 지켜내고 싶었고 보답하고 싶었다. 이상향이 같은 사람에 대해 얼마나 의리 있어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알게 되었다. 내가 독립투사였다면 같은 독립군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결국 끊어냈다. 매달리는 그녀가 질리게 싫었다. 이상향이 같아서 좋아했던 것뿐인 그녀의 반대편의 모습을 겪으며 진절머리가 났다.
10년이 지나고 다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대의 한 강의실에서 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으로부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