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시킨다. 익숙한 나무, 익숙한 창, 익숙한 소리, 익숙한 자리까지.
몇 번의 이직을 했고, 창업도 했다. 나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타인의 시선에서는 변화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변화에 대처하는 에너지는 생계에 몽땅 쓰고, 그 나머지 모두는 안정적인 걸 선호하는 것 같다.
커피를 마시는 일이 나에겐 일종의 명상이나 숨과 같다.
막연할 때, 복잡할 때, 종국엔 혼자 있고 싶을 때… 파묻히고 싶을 때… 커피숍에 간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정리를 하고 미래를 그린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특별히 좋아하는 커피숍은 앤트러사이트다. 이곳은 내가 온갖 이별 후 마음을 가다듬었던 곳이고, 책을 집필한 곳이다. 새로운 사업을 기획한 곳이다. 내가 기억하는 지점은 아마도 한남, 제주, 서교, 합정 정도! 제주점은 3년 전 친한 번역가님과 여행했을 때 방문했었다. 한남점은 아직인데 일부러 찾고 싶진 않다.
서교점은 음악이 없어서 좋다. 나무와 거친 벽돌이 도처에 있다. 돌로 채워진 정원이 있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탁 트인 뷰도. 가성비 최악으로 운영하는 주인장의 철학이 담긴 장소에 끌린다. 여유로운 장소에 나를 풀어놓는다. 나에게 최적화된 놀이와 휴식을 선물하는 곳이다. 이렇게나 넓은 정원에 테이블 대신 돌로 채우다니. 진짜 멋있다.
원두에 붙인 이름들에도 취향을 저격당하고야 말았다. 시인, 작가들의 이름이란. 특히 파블로 네루다. 내게 처음으로 "메타포"라는 단어를 알려준 시인을 여기서 마신다. 맛이 뭐 그리 중요할까. 그냥 파블로 네루다 원두로! 시인의 이름을 명명할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적다.
몇 년 동안 서교점을 오가다 근래에는 합정점에 자주 다니고 있다. 2년 동안 집안에 에어컨을 달지 않고 지냈더니 자가용을 이전보다 자주 타게 되었다. 유일하게 에어컨이 있는 공간이 자동차가 돼 버려서 엄청난 기후 변화 탓. 에어컨, 선풍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켜야 할 것 같긴 하다. 걸어서 다니던 서교점을 떠나 주차 공간이 있는 합정점으로 다니게 된 이유다. 이따금씩 자가용과 자전거를 버리고 걷고 싶을 때 일부러 서교점으로 향한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마음이 여유롭다. 앤트러사이트 주인장은 아실까.
음악이 없는 유일한 커피숍. 몇 년 동안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소리 없는 공간이 귀하다. 나는 집에서도 음악을 틀지 않는다. 무엇에 집중할 때 음악을 듣지 못한다. 음악엔 빠지게 되어 있기 때문. 음악만 듣는 곳에서 음악만 듣는 게 좋다. 하나만 아는 바보. 그래서 발견한 좋은 곳들도 있고.
앤트러사이트에는 기분 좋은 기억들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 있다. 생각지도 못해서 놀랍고 따뜻했던 에피소드들. 커피를 주문하고 나니 반값으로 결제된 문자가 올 때. 직원이 퇴사하며 케이크와 커피를 선물로 줄 때, 주말엔 리필 정책이 없어졌다고 설명하는 신입한테 '제가 드릴게요' 하며 이전 정책을 그대로 적용해 주는 매니저분이 오늘은 여기로 오셨네요 라며 말을 건넬 때. 서교점엔 음악이 없는 게 특징인데 오전 일찍 텅 빈 홀에 둘만 남았을 때, 어떤 음악을 좋아하시냐고 음악을 선물한 매니저도 있었다. 카푸치노를 주문했는데 아메리카노를 주셔서 그냥 마시겠다는 말에 다시 만들어 드리겠다며 추가 비용을 받지 않고 자리까지 가져다 줄 때.
한발짝 떨어진 타인의 친절과 배려 속에서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받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