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AI 시대에 필요한 나만의 세계 확장법

by 박예찬

작디작은 '모찌'가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다.


작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여드레 앞둔 어느 겨울날이었다. 2.5kg의 가냘픈 몸으로 이 땅에 온 아이, 태명 ‘모찌’를 우리 가족으로 맞이했다.

2.5kg으로 세상에 온 모찌(태명)

새로운 생명의 등장은 명백한 축복이었으나, 주변의 반응은 사뭇 결이 달랐다.

축하 뒤에 반드시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말은 "이제부터 고생 시작이네"라는 염려 섞인 경고였다.

미디어를 통해 신생아 육아의 고단함을 익히 들어왔기에, 그저 흔한 덕담이나 과장된 조언 정도로 치부하며 가볍게 넘겼다.

더욱이 조리원 선생님들은 "모찌는 순해서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으니 걱정 마세요"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내 아이만은 그 '육아 고충'의 공식에서 예외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았다.

조리원 문을 나서는 순간, 나를 향했던 수많은 격려와 걱정은 활자가 아닌 '실재'가 되어 쏟아졌다.

피곤해 보이지만 그나마 괜찮은 날이었다.

원인도 이유도 모르는 채 우는 아이를 보며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모르는 미안함과 달래주지 못하는 무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반복되자 신체적 한계는 곧 현실이 되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경험하지 못한 채 접했던 언어는 그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색무취의 기호였음을. "고생하겠네"라는 짧은 문장 안에 담긴 그 수많은 땀방울과 인내를 나는 그저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실제로 경험하고 나서야 그 투박한 걱정들이 나를 향한 진심 어린 배려이자 사랑이었음을 온몸으로 감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단어의 뜻은 머리로 알 수 있지만, 언어의 온도와 진정한 의미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채워지는 것 같다.


내 경험이 언어를 좌우한다. 그리고 세계를 결정한다.



경험으로 언어가 확장된다는 생각이 이어져 문득 한글을 뒤늦게 배우신 어르신들이 쓰신 시가 떠올랐다.

그곳엔 화려한 수식어도, 현학적인 단어도 없다.

이순례 어르신의 시 '새가 된 당신' / 출처 - 세종메일


하지만 그 투박하고 쉬운 문장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깊게 울리는 이유는 그 언어 마디마디에 평생을 살아낸 '삶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 AI 이미지 제작


나는 이 문장을 나만의 방식으로 뒤집어 생각해 봤다.

"내 경험이 언어를 좌우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를 결정한다."

AI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세계의 확장


모든 것을 알고리즘과 AI가 대신해 주는 시대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만큼만 AI라는 도구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다.


질문자의 역량과 경험의 깊이에 따라 AI가 내놓는 답변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지 못한 감정과 겪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던질 수 없는 법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앞으로 수많은 언어를 직접 경험해 나갈 예정이다.

그 언어에 담긴 '감정'과 '의도'를 오롯이 체득하며 나의 세계는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검색창 앞의 세련된 손가락이 아니라, 직접 부딪히고 느끼며 내 세계를 넓히는 '경험의 의지'가 아닐까. 모찌가 자라나는 속도만큼, 나의 언어도 나의 세계도 그렇게 깊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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