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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상 Jul 27. 2024

002. 겸손과 우울에 관하여

-essay

내 어린 시절, 그러니까 좀더 정확한 시기로 말하자면 14살쯤이니 중학생 시절 내 스스로에게 지은 별명이 


숨겨진 인재


였다. 이유는 단순하였다. 나에게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는데 아직 뾰족히 뭔가 드러나게 잘 하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모든 사람들은 내게 많은 잠재력이 있다고 하였고, 나역시 그 말을 믿었다. 그렇기에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나도 못 찾는 곳에 나의 잠재력이 내 안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내 안의 숨겨진 잠재력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톡 튀어나와 내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기도 하였고, 왠지 그렇게 나를 치장해야 주눅들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43살-국가에서 한 살을 디스카운트를 해줘 갖게된 나이지만, 난 여전히 내 숨은 잠재력을 찾지 못하였다. 아니 사실 며칠 전 만 하더라도 나는 지난 회사에서 나의 숨겨진 잠재력이 마케팅이라고 추정(?) 하고 있었다. 학원시절 예산 문제로 대행사를 쓰지 못해 직접 블로그 글도 쓰고, 광고 툴을 돌린 이력이 있던 그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경험이 다음 회사에서는 어떻게 하다보니 독보적인 나만의 경쟁력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온라인 마케터라는 수식어가 나름 수식어가 붙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하다보니 내 스스로도 그 경험과 노하우로 드디어 내 숨은 잠재력을 찾았나 싶었다. 

그렇게 추정한던 잠재력을 갖고 6년을 지내고 보니 어느새 내안의 의심이 확신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리고 그 확신이 교만으로 닫게 되었다. 

아! 잘 나가다 교만으로 닿았냐고? 바로 그 다음이 문제였다. 24년 올해 난 상반기가 종료되는 이틀을 남겨두고 회사 두곳을 갈아치웠다. 각각의 개인적인 사유도 있었지만 나를 가장 괴롭히던 것은 


나는 맞고, 너희가 틀렸다.

라는 생각에서였다. 브랜드 마케팅에 대한 나의 생각과 너희들의 생각, 온라인 마케팅에 대한 나의 생각과 너희들의 생각. 나는 서슴없이 그들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틀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이글을 쓰는 24년 하반기의 초입인 7월의 더운 여름과 습습한 장마의 줄다리기 사이인 어느 날, 비워져 가는 통장을 애써 무시한채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그렇게 내 삶을 외면한 채 씩씩 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 생기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잠자리 까지 설치며 몇 날 며칠을 보내고 있다. 


CPM이 뭔지는 아시죠?

이야. 헤드 헌터를 통해 지원하게 된 회사의 최종면접에서 받게된 너무나도 어이없고 기초적인 질문이었다. 문제는 그게 너무 기초적인 질문이라 말로 순간 설명을 하려니 말문이 막혔고, 결국 잘못된 설명을 한 것이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들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너무 쉬운거라 뭔지는 아는데 설명을 못하는. 문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내 의도와 상관없이 틀려서 나중에 이불킥을 하게되는..  하아. 매번 100페이지가 넘는 교안을 일일이 직접 작성하고, 교육을 하던 내가 그걸 헷갈려하고, 틀렸다는 점에서 아주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났다.  그리고나서 부터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또다시 나의 교만을 꿈틀거리며 다투게 만들었다. 면접을 마치고 씩씩거리며 '그래 이딴 회사 안가고 말지. 별 시덥지 않은 질문을 하고 회사 꼴이 아주 잘 돌아가겠다.' 마음 속에서 침을 '탁' 뱉어 버리고, 헤드헌터에게 분풀이 아닌 분풀이를 하고 보란듯이 바로 다음 날, 탈락 문자를 받았지만 문제는 그때 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내가 원래 이런 실력의 소유자였을지 몰라



어느 틈엔가 교만에서 확신으로 다시 확신에서 의심으로 내려온 나는 이러한 생각이 떨쳐지지 않아 마침내 다음 단계 인 우울증으로 갔다. 지난 수년간의 내가 자신있어 하던 경력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뭐지? 나를 공격하던 그 임원이 앞으로 내가 갈 어딘가의 회사에 임원으로 와서 나를 보고 무시하고 웃으며 짤라 버리면 어떡하지? 별의별 생각들이 내 머리 속을 괴롭혔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산책 중 갑자기 튀어나오는 강아지에 놀라 기겁을 하기도 하고, 운전을 하고 가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와이프가 무심코 한 말에도 화를 내거나 아니면 거꾸로 서운해 스스로 토라져 버리기도 하는 내 심연의 아주 깊은 곳까지 추락을 하였다.  


나 같은 놈은 우울증이 있어야 교만해지지 않는 것 같아

아침을 먹으며 꺼낸 나의 이 말에 와이프는 혀를 찬다. "우리가 누군가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는 겸손이라는 마음가짐 자체가 이미 '난 너보다 강하지만'이라는 교만에서 비롯된 거 아니겠어?" 나의 궤변은 그렇기에 사람이 진짜 교만하지 않으려면 어느정도 우울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도 내가 왜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지 이성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가 없다. 와이프는 내 궤변에 발끈하듯 대꾸하였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겸손해지기 위해 우울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잘 못된 말이지. 겸손은 마음으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게 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걸 우울증으로 교만을..." 그 뒷 말까지 들리지도 않았다. 며칠 전 치명타를 맞은 면접에서 지난 세월 마침내 찾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숨겨진 잠재력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제국이 무너진 지금 이 순간. 나의 우울증은 너무나 완벽해졌고, 그게 겸손이든 뭐든 '나는 옳고 너희들은 틀렸다'라는 생각을 철저하게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와이프의 끝말이 들려왔다. 


그래서 내생각에는 Why보다 How가 더 중요한 거 같아!

그녀의 말에 의하면 why의 종착역은 결국 우울증이지만 how가 이끄는 생각은 앞으로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겸손과 우울은 그렇게 why와 how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그녀의 말에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4년 하반기의 시작인 7월도 절반이 지난 지금 이 시간. 자칭 숨겨진 인재, 아직 드러나지지 않은 나의 잠재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이제는 how 나아가야 할지 되짚어 봐야 겠다고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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