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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상 Jul 22. 2024

프롤로그: 내 생애 첫 글

-essay

언제부터였더라?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린 시절부터이긴 한데 -사실 그 어린 시절에 대해 누군가 정확히 몇 살때 부터였냐고 물어본다면 정확히 언제라고 말 해줄 자신은 없다. 내가 내 안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게 된 시작점이 언제인지 추정되는 하나의 분명한 시점의 근거는 국민학교(80년대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다) 2학년때 부터라고 생각이 든다. 

2학년 때 일기장에 일주일에 최소 2번  정도는 시를 썼던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일기장과 시집을 분리해서 제출하라고 하셔서 작성하였던 별도의 나만의 동시집이 있었다. 6학년때는 모닝글로리라는 브랜드가 적힌 스프링 수첩에 빼곡히 적은 나의 여러 시와 작사한 노래들이 기억이 난다. 나름 폼잡은 자세의 사진을 찍어 인화하여 제일 앞 쪽에 붙여놓고 바로 다음장 부터 글들을 적으며 군데군데 나의 사진들을 붙여 놓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 수첩을 나혼자 만족하고 책상 위에 둔것이 아니라 반 아이들에게 돌려가며 읽어보라고 하였고, 나름 아이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사춘기가 한창인 중학교 3학년때는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시전을 하였는데 나의 자작시를 걸어두기도 하였다. 그림은 막내이모가 그려 주셨다. (이 글을 지금의 와이프가 볼 수도 있겠으나 흠흠..) 해당 시는 당시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마지막 선물로 내 감정을 담은 시였다. 



그러나 글을 사랑하는 나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곧잘 교내에서는 글짓기 상을 받았지만, 그런 나의 잠재성과 글짓기에 대한 사랑을 알아본 선생님들은 교외 대회를 소개해주며 나갔지만 외부에서는 단 한번도 상을 받지 못하였다. 하다못해, 고등학교 시절, 나의 글쓰기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신 국어 선생님이 시인이자 당시 교과 선생님이었던 분께 나를 소개시켜주며 조금더 키워서 외부 글짓기 대회에 내보내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연거푸  내가 상을 받지 못하자 언제부터인가 대회는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잔신부름을 시키셨다. '아..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겠구나.' 하고 나는 글쓰기를 멈추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그 해만큼은 내가 쓴 글이 없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도 중독인 건지, 아니면 글로 늘 내 마음을 분출하였기에 내 심장의 독이 가득차서였는지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나서 난 시동아리의 문을 두들겼다. 매주 시를 적어와 동아리 사람들끼리 함께 시를 암송하고 느낀 점들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었는데, 당시 첫 대학이었던 신학과에서의 생활이 너무도 힘들었던 때라 그 시를 적고 함께 나누는 시간들이 너무도 소중하였다. 그렇게 매주 시를 읽고 가장 인기가 많은 시를 동아리 문 앞에 걸어두었는데 유일하게 내 시가 한번 걸린적이 있어 아래 일부만 남겨본다. 


꼬마는 태양 주위에 돋아나 있는
가시들을 깎아 별을 만들고
"팡팡"
둥근 콤팩을 두드려 어둠을 털었다 
그리고는 짓궂은 얼굴로
지구를 한 손에 들어
있는 힘껏 던져 버린다 

"하하하"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걸까?'
잠든 꼬마의 머리를 살며시 넘기시며
미소짓는 어머니
-재미있는 나라 중 일부, 홍성우, 2000년

 그리고 두 번째 대학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필명을 만들게 되었다. 이름은 바로,

하늘 시인

단순하고 지금은 굉장히 진부한 필명이지만. 며칠을 고민해서 지은 이름이었고, 당시에는 해당 필명을 특정 포털에 닉네임으로 지정을 해도 중복에 한 번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나름 신선한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왜 난 필명을 갖게 되었는가? 사실 필명을 짓고자 한게 아니라 다음 이라는 카페가 당시 유행을 하였는데 카페 명을 지으면서 만들게 된 것이었다. 사유는 구구절절하지 않게 설명을 하자면 당시 머리에 뇌종양이 있는 친구가 있었다. 병원에 있을 그 친구를 위해 약 80여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소소한 이야기를 적어 이메일로 보내 주었는데, 나중에는 그 일기형식의 나의 이야기를 카페로 만들어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70여명의 회원도 보유할 만큼(죄다 내 친구들이었고, 그 친구의 친구 이런 식이었지만) 꽤 괜찮게 운영되던 카페다. 그렇게 3년 정도 나만의 필명을 갖고 나만의 공간에서 나의 에세이, 시 등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며 이마저도 시들시들 해지고, 카페도 결국 폐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당시 유행하게 된 것은 싸이월드였다. 당시 물만난 물고기 마냥 나의 글들을 시즌제로 운영하며 글들을 마구마구 쏟아내었다. 싸이월드의 배경음악과 그 음악이 찍어냈던 나의 지난 기억 속의 감정과 글들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였다. 그리고 난 싸이월드에서 첫 도전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제목은 바로,

테러리스트

당시 느와르에 심취해 있던 나는 예전에 인상깊에 보았던 아나키스트라는 영화에서 뭔가 강한 어조의 느와르 이름을 짓고 싶으며 찾은 이름이었다. 슬픈 기억을 갖고 있던 한 남자가 킬러의 삶을 청산하며 어린 시절 살았던 마을로 돌아오며 유소년기 짝사랑했던 여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받치는 아주 진부한 마초적 소설이었다. 물론 첫 소설인만큼  글도 굉장히 짧다. 대부분 소설을 1화당 A4 용지를 4~5장정도를 적는데 당시 소설은 1화당 A4 1장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소설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 난 그렇게 50화로 나름 소설 한 편을 마무리 하였다. 해당 소설은 사실 2000년 시동아리에서 내가 썼던 자작시에서 구상했던 내용이니 아래 시 한편으로 소설을 갈음하겠다. 


테러리스트, 홍성우, 2000년

그리고 마침내 2010년대 난 네이버 웹소설이라는 플랫폼에 공식 소설을 작성해서 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7번째 기억"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보고 너무도 감명을 받아 몇 년을 스토리를 고민해서 작성하게 된 어찌보면 좀 더 다듬어진 나의 외부 플랫폼에 올린 공식적인 첫 소설인 셈이다.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로 사랑하는 여자를 잊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기억 7가지를 지우는 것이다. 이번에는 나름 스토리 라인을 구성해서 결론까지 고민해서 작성을 하였다. 또한 편당 2천자 이상(A4용지 2~3장)을 작성하며 나름 규격을 갖추었다. 그렇게 첫 소설을 끝내고, 나름 즐거움을 맛본 나는 2020년에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에 새로운 소설과 함께 도전을 하게 되었다. 제목은 바로, 

잔상

편당 A4 용지 4~5장으로 웹소설의 정식 규격을 맞추고 정식으로 도전을 하게 된 소설이자, 하늘시인에서 잔상이라는 지금의 필명으로 바꾼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재미난 사실은 필명의 의미로는 언제나 나의 마음 속의 글들이 선한 울림과 잔상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지만 웹소설로는 잔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귀신의 존재에 대한 호러 소설이었다. 어찌보면 처음으로 내 감정이 배제된 완전 다른 장르의 소설을 작성을 한것 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호응으로 당시 최종결승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아쉽게 결승전에서 떨어졌지만 어떻게 첫술에 배부르랴?

그렇게 자신감을 얻고, 차기작을 준비하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빛도 못 본채 슬럼프를 맞이하고 말았다. 쉼없이 글을 쓰곤 했는데, 슬럼프가 오다니. 내 인생을 뱉어내는 노래처럼 글을 썼던 내게도 슬럼프가 오는구나. 문제는 슬럼프 만이 아니다. 24년 난 나름 죽이 잘 맞았던 회사도 나오고 이래저래 파도 위에 쓸려가듯 실패를 맛보며 상반기를 보냈다. 경력이라는 것이 역으로 나의 고집을 받치는 잣대가 되고 내 귀를 막는 아집이 되며 그 어느 곳도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24년 상반기가 끝나고 나의 패배(?)를 곱씹으며 어찌보면 내 인생 전체의 패배라 여기며 와이프 앞에 울부짖던 나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기도하였다. 

'주여.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언젠가 응급실에서 주님께서 들려주셨던 명명백백한 음성으로 저는 괜찮을 거라고, 저를 구원해주실거라고 해주소서'

 

그런 좌절 속에 기도를 하며 깨닫게 된 사실 중 하나가 언제부터인가 정작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적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에 재미를 붙이며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적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학창시절 멈추었던 그 때의 내 글쓰기의 파업처럼 말이다. 그래서 24년 하반기인 7월의 어느 날 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함께 적으리라. 그렇게 시작을 결심 하게 된 거처가 바로 "브런치"였다. 사실 2018년에도 도전을 하였지만 행동보다 의욕이 앞서 당시에는 브치 작가에는 낙방을 하였다. 하지만 드디어 오늘 난 브랜치 작가 자격을 얻게 되었다. 



마치 원하던 대학교 입학을 하였던, 그토록 원하던 기업 입사에 합격을 하였던 그 기분 처럼 뛸 듯이 기뻤다. 따스한 햇살, 책 상 위 하얀 종이와 펜의 존재만으로도 설레였던 그 어린시절의 그리움이었을까? 하얀 모니터 앞에 검은 키보드 앞에선 이 순간 가슴이 뭉클하다. 그래, 40대 중반인 나로서 24년 하반기, 내 인생의 후반전에서의 내 생에 첫글을 이제부터 써 내려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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