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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트니스 큐레이터 Aug 03. 2016

퍼스널 트레이너가 버려야 할 단어

열등 콤플렉스 /   열등감은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이 한 순간에 돌변하는 것은 사소함에 있다.

열 번 잘 해도 한 번 아쉬운 마음이 들면 지금껏 쌓아온 관계는 금이 가고 만다.

이러한 맥 빠지는 법칙은 모든 인간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다.

언젠가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참 인간의 마음이란 얄궂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한 대사를 듣고서였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조직의 보스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를 무참히 처벌하면서 하는 말이다. 보스의 여자 친구를 일개 부하가 마음에 품었다는 이유로 내쳐진 것이다.

열 번 충성해도 한 번의 불쾌감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모욕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 또한 다른 감정 중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발언이나 모욕감을 받으면 성인군자에서 폭군으로 돌변하게 된다. 자초지종을 잘 파악하지도 않은 채 나를 격하시킨 행위 자체만을 놓고 감정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타인에 대한 평가에 흔들리는 주체성의 결여 때문이라 생각한다. 즉 열등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열등감은 무엇보다 ‘태어난 환경과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동력인 주체성을 갖고 임했는가’를 돌이켜 봐야 한다.

이러한 전례를 갖고 있었던 조선 임금들의 사례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어머니가 죽임을 당하고 그 한을 품고 살았던 연산군, 방계 출신으로 왕이 된 선조, 그리고 천민 출신으로 왕이 된 영조, 이 왕들은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하여 늘 열등감을 보였다.

그로인해 결과가 하나같이 처참했다.  


내 경우도 열등감이 늘 발목을 잡았다. 한 예를 들자면,

 어느 날 한 트레이너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회원의 수업을 다른 트레이너에게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회원들이 직접 원하는 트레이너를 지목했다. 그런데 특정 트레이너에게 회원들이 몰렸다. 그 트레이너는 요즘 수업 시간표가 빼곡히 다 차여져 센터에서 가장 많이 수업을 소화해 내고 있다. 트레이닝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회원들도 잘 간파하는 모양이다.

거기까진 좋다. 트레이너의 역량차이를 내가 질투하는 건 나의 못남이기에 시기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내게 들려온 말로 인하여 수면 깊은 곳에 있던 콤플렉스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극기야 속에서 분노가 치밀러 올랐다.


“회원들이 모두 나랑 하고 싶다고 하던데요!”


분명 악의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솔직한 답변이었고 그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였다.


“그럼, 9년간 일해 온 나는 그저 그런 트레이너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열등감인 것이다.


그럼 그런 대답에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의 반응은,


“그래, 너 잘났다. 니 똥 굵다.” 하고 시니컬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서 그래도 “내가 제일 잘 나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주어진 현재에 대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이것이 앞에서 말한 주체적 자아, 건강한 자기(自己)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행동을 잘 보이는 아내가 늘 부럽고 존경스럽다.


찌질 한 천성을 늘 바꾸고 싶다. 하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는 본성.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그러한 감정이 며칠만 지나면 무뎌진다는 것이다. 그 며칠을 혼자 끙끙 앓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면도 있지만 말이다.




퍼스널 트레이너로서 근무 하면서 한번쯤은 열등감을 겪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열등감을 다르게 표현한 심리학자가 있다. 바로 ‘아들러’다.

일본의 한 철학자가 ‘아들러’라는 100년 전 정신의학자요, 심리학자인 그의 사상에 매료되어 한평생을 연구에 바쳤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책으로 나왔다. 바로 ‘미움 받을 용기’이다.

이 책에서 열등감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내놓았는데 잠깐 들여다보면,


열등감은 순수한 자신에 대한 평가이지만 열등콤플렉스는 그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하는 상태라고 한다. 구체적인 예로 ‘나는 학력이 낮다, 그러니 남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 한다’가 열등감이라면,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열등콤플렉스다.


책의 서두에서도 ‘아들러’는 ‘프로이트’와 ‘융’이 상식처럼 구축해 놓은 ‘트라우마’ 이론을 일언지하에 잘못된 이론이며, ‘아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못박아버렸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으로써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현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원인론’에 입각한 설명인데 아들러는 ‘목적론’을 내세워 그들의 주장을 뒤집어 버린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용기의 심리학’이라고 명명한다. ‘목적론’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이론은 이렇다.


“우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에 놓인 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즉 자유도 행복도 모두 ‘용기’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깐 열등감은 ‘용기’의 문제인 것이다. 즉 용기를 갖고 현재의 모습에서 변하려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열등 콤플렉스가 아닌 열등감으로,
그리고 그 열등감을 움직이는 동력은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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