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좋고 나쁨은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다. 술도 음식이니 이왕이면 맛있게 먹자. 같은 술이라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무더운 여름날 칠링이 전혀 안 된 맥주를 마신다고 생각해 보라. 향이 중요한 와인이나 싱글 몰트위스키를 전용 글라스가 아니라 향을 느끼기 힘든 샷 글라스에 마신다고 생각해 보라. 청량감이 있고 부드러운 타입의 소슈와 같은 사케를 향과 맛이 강한 훈제요리와 함께 마신다고 생각해 보라. 풀바디 레드 와인을 매운 음식과 마신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술을 맛있게 마시기 위해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기본적으로 술의 보관상태가 중요하다. 물론 보관환경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증류주(진, 럼, 보드카, 테킬라, 위스키, 브랜디, 소주 등)들은 관계 없지만 보관상태가 중요한 양조주(막걸리, 맥주, 사케, 와인 등)들은 보관이 잘못되면 상하거나 맛이 변질되었을 가능성도 많다. 기본적으로 보관이 잘못된 와인이나 사케를 마신다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다. 보관이 잘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술을 맛있게 마시기 위해 중요한 5가지 요소는 상황, 술의 온도, 술잔, 요리, 서브하는 사람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개인적인 의견이며, 다른 요소들도 있음).
둘째, 상황이라는 것은 어떤 계절이냐, 누구와 마시는가(어떤 자리인가), 식전인가 식중인가 식후인가의 여부를 말한다. 날씨가 무더울 때와 날씨가 추울 때 선호하는 술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무더운 날 데워진 사케를 마시는 일. 뼛속까지 추운 날 생맥주를 마시는 일은 생각만 해도 별로 유쾌하지는 않다. 같은 맥주라도 계절에 따라 가장 적정한 온도가 달라져야 함은 물론이다. 일반적으로 여름이 겨울보다 차게 서브되는 것이 정상이다. 구체적인 온도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다. 누구와 마시는가도 중요하다. 비즈니스 미팅인지 데이트인지의 여부에 따라 선정되는 술이 달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식전인지 식중인지 식후인지에 따라서도 선정되는 술은 달라져야 한다. 보통 식전에는 시거나 쓴 종류, 식후에는 달콤한 종류가 선호된다.
셋째, 술은 온도가 중요하다.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가장 적정한 서브온도는 당연히 다르며, 같은 화이트 와인이라고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향이 풍부할수록, 고급 제품일수록 높은 온도에서 서브하는 것이 원칙이다. 온도가 너무 낮으면 향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성분이 주를 이루느냐에 따라 온도를 정하게 된다. 사케의 경우 쿤슈, 소슈, 쥰슈, 쥬쿠슈 등 타입에 따라 서브온도가 달라져야 그 술을 맛있게 마실 수 있다.
넷째, 술잔도 중요하다. 적합한 전용잔이 있는 경우에는 전용잔에 마시는 것이 가장 좋은데, 향이 뛰어난 타입의 술은 튤립 모양의 잔이 적합하고, 향과 맛은 강하지 않지만 경쾌하고 부드러운 타입으로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 좋은 소슈와 같은 사케는 투명한 작은 잔이 적합하다. 일본의 경우 싱글 몰트위스키 전문 바의 경우 아예 샷잔을 구비하지 않을 정도로 잔에 신경을 쓴다. 어떤 잔에 마시느냐에 따라 술 맛이 달라짐은 물론이다. 필자는 심지어 등산을 갈 때도 와인 글라스를 가지고 올라간다.
다섯째, 술과 함께 먹는 요리도 중요하다. 우리가 보통 음식궁합이라고 하는 것이 술과 요리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보통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향과 맛이 약한 술은 담백 한 음식, 향과 맛이 강한 술은 전골류와 같은 진한 음식과 어울리고, 달콤한 술은 케이크와 같은 달콤한 음식이 잘 어울린다. 한편, 비린내 나는 해산물의 경우 달콤한 술이나 지나치게 오크 숙성을 한 화이트 와인은 피하는 게 좋다. 달콤한 술의 경우 세 가지 맛의 음식과 잘 어울리는데, 달콤한 음식, 매운 음식, 짠 음식이다.
여섯째, 서브하는 사람의 기술도 중요하다. 특히 바(Bar)인 경우 바텐더나 소믈리에의 역량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다. 칵테일의 경우 바텐더의 스터(Stir)나 셰이크(Shake) 기술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고, 위스키를 비롯한 증류주의 경우에도 적합한 글라스 선정, 서브 온도, 곁들이는 안주, 여러 가지를 시음할 경우 서브하는 순서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다. 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와인 핸들링은 물론이고 특히 디캔팅(Decanting)을 하는 경우 소믈리에의 실력이 드러난다. 초보 소믈리에의 경우 올드 빈티지 와인을 잘못 다루어 불상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위의 모든 요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즐거운 자리에서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마시는 한 잔이다. 과학적으로 맛은 입이 30%, 뇌가 70%를 차지한다고 한다. 즉, 시각, 후각,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분위기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역시 같이 마시는 사람이다.
전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