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유

나를 향한 작은 배려

늦게까지 일을 했다. 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고, 손을 놓기엔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이것저것 붙들다 보니 밤이 깊어졌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 늦게 잠이 들었으니 일요일 아침은 당연히 늦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은 평소처럼 떠졌다. 몸은 아직 더 자고 싶다고 말하는데 습관은 먼저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눈을 뜬 채로 잠시 누워 있었다. 창밖은 이미 환했고, 하루는 나를 보고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괜히 마음이 먼저 바빠졌을 것이다. 일어나서 정리해야 할 것들, 챙겨야 할 일들, 미뤄둔 생각들까지 줄지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눈은 떠졌지만 마음은 쉽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조금 더 게을러지고 싶었다.


나는 다시 이불을 끌어당겼다. 몸을 조금 더 웅크리고 따뜻한 자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시 잠을 청했다. 그 순간, 작은 해방처럼 느껴졌다. 누가 허락해 준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나에게 오늘은 조금 느슨해져도 된다고 말해준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 이미 다 지나가고 난 뒤였다. 시계를 보니 정오였다. 반나절이 훌쩍 지나 있었다.

순간 마음 한쪽이 살짝 무거워졌다. 이렇게 게을러도 될까. 너무 시간을 흘려보낸 건 아닐까.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쭈르륵 머릿속에 스쳐갔다. 너무 느긋하게 쉬어버린 건 아닐까 잠깐 후회가 되었다.


늘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마음은 생각보다 깊이 몸에 배어 있다. 조금만 멈춰 있어도 괜히 뒤처지는 것 같고, 조금만 쉬어도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도 나를 다그치지 않는데 나는 자주 나를 재촉한다. 쉬는 날에도 잘 쉬는 법보다 알차게 보내는 법을 먼저 떠올린다. 편히 누워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생산적이지 못한 시간을 조용히 흠잡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런데 가만히 누운 채 몸을 느껴보았다. 신기하게도 몸이 개운했다. 억지로 일어나지 않아서인지 오랜만에 푹 쉰 사람처럼 몸이 한결 가벼웠다.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끼니 마음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무언가를 하지 못했다는 조급함보다 지금 이 정도의 느긋함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쉼을 채운 것이었다는 걸.


우리는 자주 쉬는 시간마저도 평가한다. 얼마나 의미 있게 쉬었는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회복했는지, 심지어 쉰 뒤에 더 열심히 움직일 수 있어야 그 쉼이 정당해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쉼은 꼭 쓸모를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쉬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숨을 돌리는 시간도 있다.


늘 부지런해야 한다고 나를 몰아세우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친다. 겉으로는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도 내 안에는 작고 얇은 피로들이 겹겹이 쌓여간다. 그러다가 몸도 마음도 굳어간다. 그래서 가끔은 의도적인 게으름도 필요하다. 계획하지 않은 늦잠, 서두르지 않는 아침, 아무 목적 없이 이불속에 더 머무는 시간. 그런 느슨함이 생각보다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예전에는 게으름을 조금 부끄럽게 여긴 적도 있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좋은 사람의 태도라고 믿었고, 쉬고 있는 나보다 움직이고 있는 나를 봐야 더 안심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늘 달리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쉬는 사람만이 다시 자기 속도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게으름에도 결이 있다.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게으름이 아니라, 나를 회복시키는 게으름이 있다. 세상을 피하기 위한 멈춤이 아니라, 나를 돌보기 위한 멈춤이 있다. 오늘의 늦잠은 내게 그런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를 위한 시간이었고, 겉으로는 멈춰 있었지만 내 안에서는 조금씩 회복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나를 쓸모로만 판단한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생산적이었는지, 얼마나 계획대로 살았는지로 하루의 가치를 매기곤 한다. 하지만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날이 되기도 한다.


몸이 쉬었고, 마음이 덜 조급했고,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하루가 된다. 일요일 정오의 늦은 잠자리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가끔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구나. 조금 느려도 괜찮고, 조금 게을러도 괜찮고, 하루쯤은 세상의 속도보다 내 몸의 속도를 따라가도 괜찮겠구나.


오늘 나는 조금 게으르게, 조금 느긋하게 나를 쉬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나를 향한 작은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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