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행사 진행을 맡게 되었다. 전문 사회자가 아니지만 상황상 몇 번 작은 행사에서 진행을 맡아본 적이 있다. 그나마 두어 번의 경험이 있다고, 전문 사회를 보시는 지인이 나를 적극 추천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무대에 서는 일은 늘 시작 전이 더 길다. 사람들은 보통 행사가 시작된 순간만 본다. 또박또박 이어지는 말, 자연스러운 진행, 어색하지 않은 표정. 하지만 그전에는 늘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다.
책상 앞에 앉아 대본을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문장을 눈으로 읽고, 입으로 다시 읽고, 한 번 더 소리 내어 읽어보는 시간. 발음이 꼬이지 않도록, 의미가 흐려지지 않도록,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문장을 자꾸 입안에서 굴려본다.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할지, 어디에서 잠시 멈춰야 할지, 어떤 단어에 힘을 주어야 할지 작은 것들을 하나씩 점검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그 시간은 내가 맡게 될 자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한 문장을 정확하게 말하는 일, 한 사람의 이름을 또렷하게 부르는 일, 한 순서를 흔들림 없이 이어가는 일. 겉으로 보면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집중이 필요하다.
숨을 고르는 것도 연습하고, 목소리의 높낮이도 점검하고, 너무 빠르지는 않은지, 긴장한 티가 그대로 묻어나지는 않는지 녹음된 내 목소리를 다시 들어본다. 조금 어색하면 다시 읽고,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또 반복한다.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읽는 시간이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고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시간이 싫지 않다.
준비를 한다고 해서 불안감을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불안을 그대로 두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두는 일. 연습은 어쩌면 그런 마음의 표현이고 보이지 않는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조용 활동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어떤 일은 결과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더 오래 남는다. 잘하고 싶어서 애쓴 마음, 실수하지 않으려고 다듬은 문장,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반복한 시간들. 그런 것들이 쌓여 비로소 한 번의 자연스러운 강의가 되고, 진행이 된다. 사람들은 익숙하게 잘 해내는 모습을 보면 원래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누군가가 강의나 진행을 잘하는 모습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많이 든다. 하지만 그런 능숙함이나 익숙함은 대개 많은 시간의 투자와 여러 번의 어색함을 지나온 뒤에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이는 것만 보게 된다.
나 역시 그렇다. 대본을 보며 몇 번씩 같은 문장을 읽고, 숨 쉬는 타이밍을 체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이 시간이 바로 그 어색함의 시간이다.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연습하고 있다. 그래서 책상 앞의 이 시간이 조금은 든든하다.
연습은 지금의 부족함을 확인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일의 나를 조금 더 믿어보기 위한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