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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달래 Jun 27. 2020

장례식장에서의 초상



 젊었을 적 아빠는 건강한 신체 그것 말고는 가진 게 없었다. 엄마보다 여덟살이나 많고 빈털터리인 아빠의 손에 묵묵히 돈을 쥐어주며 결혼을 허락한 할아버지는 속내를 잘 알 수 없는 분이셨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아빠의 마음속에 할아버지가 정확히 어떤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아버님,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 불렀다.


 아빠 뭐 드시고 싶다는데? 아빠한테 들어가보자.


 아빠는 할아버지 영정사진 앞에서 벌겋게 퉁퉁 부은 눈으로 계속, 계속 울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신뢰에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생은 아빠 스스로가 고개를 끄덕일 만큼 보답을 하기에는 너무 짧았고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아빠는 보답에 실패했다. 그래서 구석에 두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옆에서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과 실패는 타인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심판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걸 그 순간, 눈물 흘리는 아빠를 보며 깨달았다. 아빠는 자신을 실패했다고 심판했다.


 작은 삼촌은 의연했다. 삼촌은 항상 그랬다. 명절에 모인 사람 수가 많아지며 가끔 큰 소리가 날 때면 상황 정리는 언제나 차분하고 긍정적인 삼촌의 몫이었다. 삼촌은 평소의 삼촌답게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러다가도 직장 동료가 조문을 오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일주일만 지나도 기억나지 않을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장례 이틀째 되던 밤, 삼촌이 거나하게 취해 할머니 앞에 앉았다.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는 삼촌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리고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술주정을 하던 삼촌이 이내 입을 크게 벌리고 엉엉 소리내며 어린아이처럼 아주 크게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손수건으로 삼촌의 얼굴을 닦아주며 삼촌을 불렀다. 막내야 막내야 울지마. 오십이 넘은 삼촌은 그 날 밤 이후로 밤만 되면 내내 그렇게 술에 취해 아기처럼 울었다. 누군가의 남편도 아빠도 삼촌도 아닌 막내가 되어 엉엉 울었다. 삼촌이 울며 내게 물었다. 다송아 삼촌도 오늘은 울어도 되지? 삼촌 울어도 되잖아 그치?


 삼촌은 슬픔을 숨기는 것에 실패했다. 무던하게 슬픔을 떠나보내려 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다. 삼촌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년이 넘은 지금도 술만 먹으면 장례식장에서처럼 할아버지를 찾으며 소리 내 운다. 처음이 어려웠지 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소리 내 본 삼촌은 어쩌면 그렇게 일 년에 한 번은 모두에게 들리게 슬픔을 해소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슬픔을 숨기는 것에 실패한 것은 삼촌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랬다. 우리는 실패했다. 밖에선 손님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할아버지 사진 앞에만서면 눈물을 흘렸다. 어느 쪽도 거짓은 아니였다. 손님들과 웃고 떠들 때면 아주 잠시나마 할아버지의 죽음이 우리에게서 없는 일이 된 듯 했다. 잠깐이라도 그렇게 잊지 않으면 슬픔에 질식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언니는 눈물을 참는데 실패했다. 언니는 눈물이 참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언니가 울었다. 할머니에게 전화하려고 연락처 화면을 켰는데 밑에 할아버지 번호가 뜨더라며 그렇게나 많이 울었다. 사람은 떠나도 그 흔적은 남는다. 언니의 휴대폰에 남겨진 할아버지의 번호라던가, 엄마의 휴대폰 앨범에 저장되어 있는 할아버지 생신 축하 파티 영상이라던가 하는 것들. 언니가 우는 것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공포. 남겨진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일 줄은, 아직 많은 날을 살아보지 못한 나는 몰랐다. 정말 몰라서 결국 아빠와 삼촌과 언니의 실패가 곧 나의 실패라는 걸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알게 되었다.



 보답에 실패하여 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아빠 하나 뿐일까. 슬픔을 숨기는 것에 실패하는 사람이 어디 삼촌 뿐일까. 눈물을 참는 것에 실패하는 사람이 어디 언니 뿐일까. 모든 것이 결국 장례식장에서의 나의 실패로, 그리고 미래의 나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나는 보답하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슬픔에는 면역력이 없었으며 눈물을 참는 것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어려운 사람이었으므로.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부지 또 올게요.


 할아버지가 떠나기 일주일 전 오후 엄마가 내게 전화해 물었다. 할아버지가 자꾸 나를 보고싶어 한다고. 기차표가 없어 엄마 나 다음주에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내가 한 대답은 겨우 기다려였다. 할아버지를 보러가지 못하는 이유는 겨우 '기차표가 없어서'였다. 할아버지가 있는 관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할아버지 내가 또 온다고 했는데, 토요일에 왔어야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 보고싶다고 했는데, 나 여기 왔는데.


 할아버지가 관으로 들어갈 때 이모와 엄마가 비명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해서 외쳤다. 아버지 잘가 아버지 잘가. 가끔 졸업한 초등학교를 들릴 때면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찾곤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거기 있었고 졸업한 후에도,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있는. 마치 평생을 그렇게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플라타너스 나무. 할아버지는 플라타너스 나무 같았다. 외갓집 대문을 열고 안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할아버지 자리, 그리고 그곳에 꼿꼿히 앉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그래 다송이 왔냐' 하던 한결같은 레파토리의 할아버지.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곳에 앉아 '그래 다송이 왔냐' 라고 말해줄거라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에 함께 들린 할아버지의 자리에 더 이상 할아버지는 없었다. 이젠 그곳에 할아버지가 없다. 할아버지를 땅 속에 묻었다. 그 다음 날은 언니의 생일이다. 할아버지 물건을 정리했다. 언니의 생일선물을 샀다.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는 생일을 축하하는 행위에 죄악감을 느낀다. 우리는, 나는 오늘도 실패한다. 탄생과 죽음의 결투에서 결국 이기는 것은 죽음이다. 축하해주는 일에 실패한 우리는 또 운다. 죽음을 슬퍼하고 탄생을 축하하는 어제와 오늘. 삶은 그렇게 죽음과 탄생으로 가득한데, 누군가가 오면 누군가는 가고 누군가가 떠나면 누군가는 오는데, 그게 자연의 섭리이고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아는데. 가끔은 그게 당연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집 리모델링 탓에 언니와 반려묘 미오가 시골 할머니 댁에서 약 두달간 할머니와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와 미오의 첫 만남은 어색함과 낯가림으로 가득했다. 길고양이가 아닌 고양이는 처음 보는 할머니는 미오를 괴생명체 취급했고 미오는 할머니를 피해 숨기만 했다. 미오가 할머니 댁에서 지낸 지 한 달 즈음 됐을까. 할머니가 대뜸 말씀하셨다. 누가 10억을 준대도 미오는 안 줄 거라고. 할머니 휴대폰 사진첩은 어느새 미오로 가득했다.


 모두가 일하러 나간 적적하고 넓은 집에서 할머니와 미오는 서로가 유일한 친구였다. 미오 없으면 할머니 심심해서 어떡하냐는 걱정에 무던히 웃으며 괜찮다고, 별 상관없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나는 괜찮지 않아서 자꾸 슬퍼지고 두렵다. 정을 주고 사랑을 준다는 게 참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 그게 무섭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언젠가 날 울게 만든다고, 너무 작은 것들까지 사랑하지 말라는 글이 떠오르는 밤이다. 하루, 한 달, 일 년이 지날수록 무언가에 정을 준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별과 그 후의 고통을 경험하고 나면 나도 할머니처럼 덤덤히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헤어짐이 두려워 정을, 사랑을 망설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남을 사랑하게 되는 일과 그들이 떠나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인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크고 작은 사랑을 하고 가슴 아픈 이별을 보고 들었다. 두려워 시도하지 않으려 하지만 난 언제나 실패한다. 사랑을 하고 떠나보낸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모순이다. 두려워 실패하고 싶지 않지만 난 여전히 사랑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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