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27
그럴 나이
오늘 버스를 타고 카페를 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나이'라는 건 무엇일까.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럴 나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듣는다. 직장 안에서 나이가 어린 편이라 그럴 것이다. 그런데 10대에 들었던 그 말을 20대 초반에도 똑같이 들었고 30을 눈 앞에 둔 지금도 여전히 듣고 있다. 이제는 궁금해진다. '그러지 않을 나이', '그러면 안 되는 나이'는 언제 찾아오는가. 그리고 '그래도 되는 나이'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확실한 경계가 없고 작은 몇 개의 사례에 모든 사람을 끼워 넣어 일반화하는 '그럴 나이'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버스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신발을 벗고 양발만 신은 채로 앞좌석 쪽으로 다리를 뻗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 나이 때는 저럴 수 있지. 저런 사람이 가끔 있어.'라는 생각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버스 안에서 신발을 벗고 앞좌석으로 다리를 뻗으면 안 되는 나이는 무엇인가.
주말이면 친구를 만나 서울에 있는 일명 '핫플레이스'라는 곳을 찾아다니는 나에게 동료 선생님은 말한다. '어휴 좋을 때다 그럴 나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은 다양한 나이대의 동료들이 소속되어 있는 각종 계와 소모임을 비롯한 종교 모임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사연들이다. 내가 친구를 만나 놀러 다니는 것과 40대-60대의 사람들이 모임을 가지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당신들 역시 '그럴 나이'에 속하지 않느냐고 차마 입밖로 내지 못하는 반문을 속으로 해본다. 그들이 말하는 '그런 나이'가 또래를 만나 맛있는 것을 먹고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떠는 나이라면 누구나 '그럴 나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중고등학생을 보면 참 잘 웃는다. 낙엽만 떨어져도 웃는 나이라는 말을 누가 지었는지 그 나이대의 아이들을 표현하기에 그만큼 적절한 말도 없다. 그런데 낙엽만 떨어져도 웃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있다. 나는 웃음이 없는 편이다. 티비 예능을 보며 웃는 경우는 일 년에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박장대소를 하는 날은 특별한 날로 기록될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잘 웃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곧 정년퇴임을 앞두신 60대 선생님이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이신데 웃음소리가 창문을 뚫고 나올 정도로 밝고 경쾌하다. 내가 듣기에는 그저 일상의 말일뿐인데 선생님은 배꼽을 잡고 웃으신다. 그럼 나는 종종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그럴 나이죠.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즐거운 나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지금 놀리는 거냐며 싸움이 일어나겠지만 나는 진심이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별일이 많지 않은 나이대의 사람은 고되고 미칠 것 같은 슬픔보다는 그럭저럭 견딜만한 고통과 익숙한 굳은살과 같은 무던함이 생겨 웃을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그럴 나이'라는 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나이'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으며 누군가를 '그럴 나이'에 넣는 편협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그들이 경험한 일들은 또 얼마나 다채로울까. 그들을 나이에 따라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나는 그들이 모두 그럴 나이, 그럴 수 있는 나이, 그래도 되는 나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