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스팀다리미를 샀다. 세탁을 잘못한 바람에 옷들이 전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평소 귀찮은 일은 질색하는 터라 그냥 옷들을 다 버려버릴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 그 고민을 실행에 옮길 만큼 통장 잔고가 넉넉하지 못했기에 작은 핸디형 스팀다리미를 사게 되었다. 스팀다리미가 담긴 박스를 뜯으며 역시 너무 귀찮다고 생각했다. 박스를 뜯고 포장된 부품을 확인하고 설명서를 읽고 물을 담고...
처참하게 구겨진 니트를 옷걸이에 걸고 스팀다리미를 주름 위에 올렸다. 푸쉬이이익- 흰 연기가 한숨과 같은 비명을 뿜으며 니트 위를 지나갔다. 다리미는 그 작은 몸으로 굵고 진한 선들을 하나둘 지웠다. 점차 말끔해지는 니트를 보는데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속이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허무한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살기 시작한 지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올해 처음 다리미를 샀다. 다리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칠칠맞고 실수투성이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수시로 세탁을 잘못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옷을 보관하곤 해서 언제나 다리미가 필요했다. 뒤늦게 다리미를 산 지금에서야 생각해본다.
나는 왜, 다리미를 사지 않았을까.
나는 어쩌면 다리미를 싫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어쩌면', '걸지도 모르겠다'라는 무책임한 서술은 필연적이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인생을 다리미로 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김살'이라는 단어를 보면 자연스럽게 다리미가 떠올랐다. 옷의 구김을 펴는 것처럼 사람이 가진 구김살도 다리미가 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옷의 주름은 펴주면서 구김살은 못 펴는지. 사람의 구김살이라는 게 대부분이 본인이 원해서 가진 게 아닌데. 세탁기를 잘못 돌린 인간에 의해서 구겨진 옷처럼 나의, 우리의 인생은 잘못 돌린 누군가에 의해서 구김을 가지게 된 건데. 그래서 억울했다. 모두가 구김살 없는 표정, 구김살 없는 웃음을 지으며 사는 실현 불가능한 바람을 가졌다.
세상이 미웠던 시기에 했던 어두운 생각이었다. 사회에 나와 삶에 순응하게 되면서 잊었던 바람이었는데 이렇게 다리미를 손에 쥐고 그 바람을 다시 떠올렸다. 지금도 여전히 다리미는 너무 쉽게 구김을 편다. 어린 시절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기 시작한 지금의 나는 인간이 가진 구김살 역시 펼 수 있다는 얄팍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옷의 구김처럼 빠르고 쉽게 사라지진 않겠지만 천천히, 정성을 들인다면 못 없앨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준비물이 필요했다.
다리미보다 더 뜨겁고 오래가고 고장 나지 않는 것. 지치지 않는 것. 쓰다듬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을 수 있는 것. 연기를 뿜고 비명을 질러도 포기하지 않는 것.
유치하고 뻔한지만 대체할 것이 없는 유일무이한 그것.
준비물은 사랑이다.
아직 내 구김살은 진한 선으로 여기저기 상처 나 있지만 언젠가는 뜨거운 온기로 하나둘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다리미가 없던 시절 구겨진 옷을 막 입고 다녔던 내가 이제는 다림질을 한다. 이런 나의 변화가 좋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아직 나타나지 않은 내 다리미. 올해의 목표는 내 다리미를 찾는 것으로 해야겠다.
2019. 2. 24
그리고 2020. 6. 16
+ 이 글을 쓰고 1년이 넘은 지금, 나는 여전히 다리미와 준비물을 찾아 헤매고 있다. 쉽게 찾아진다면 그 소중함도 가벼워지겠지. 보물 찾기가 쉬운 게임이었다면 그건 '보물' 찾기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