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조금 더 특별한 말로 이 글의 시작을 알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애석하게도 저 두 글자 말고는 우리 둘이 나눌만한 다른 인사말이 없더라. 그래서 단 두 글자를 썼을 뿐인데 벌써부터 서글퍼지고 말았어. 내가 '안녕'하면 너도 '안녕'하는 사이. 우리 둘 사이는 딱 그 정도였지.
하늘이 어둡고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다녀. 비가 올 건가 봐. 네가 생각나. 빗물에 미끄러져 혹은 빗물에 시야가 흐려져 네가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 가끔은 한 번쯤은 안부를 물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렇게 걱정이 되고 궁금하다면 한 번은 연락해봐도 좋지 않을까. 친구니까.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건지 우리가 처음 만나 술에 취해 서툰 고백을 한 지 9년,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우리가 서로를 잊고 산지가 벌써 6년이 되었구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네가 날 찾아와.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정말이야. 가랑비가 내릴 때면 내 마음 젖는 줄도 모르고 내리는 비 속에서 널 봤고 소나기가 내릴 때면 나의 서투름과 너의 선함이 내 귓가를 두드렸어.
난 말이야, 그 길이 되게 좋았어.
그 길이 흔히들 말하는 원룸촌 골목이었잖아. 개성 없는 건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중간 잿빛 아스팔트를 중심으로 회색 건물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채도는 없고 명도만이 존재하는 그런 길. 그 길에 똑같이 생긴 원룸 건물이 워낙 많아서 나는 나만의 번호를 붙여 불렀어. 회색 건물 1,2,3,4,5...
나는 회색 건물 3에 살았고 너는 그 건물의 맞은편 회색 건물 4번의 살았지. 그거 아니? 나는 그 골목뿐만 아니라 우리 집도 참 좋았다. 신축도 아니고 지어진지 10년도 더 된 건물이었고 햇빛이 들지 않아 여름이건 겨울이건 계절 가리지 않고 곰팡이들이 문을 두드려대는 그런 흔해 빠진 집이었지만.
강의에 늦어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던 3월이었지 아마. 넌 기억 못 하겠지만 나에겐 아주 특별한 날로 기억된 그 날, 나는 익숙한 아스팔트 땅을 뒤로 밀어내며 뜀박질을 시작하려던 찰나 너와 눈이 마주쳤어. 회색 건물 4 창문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너를.
그때 저희 과 과티가 분홍색이었어. 이건 기억하니? 여자건 남자건 질색을 했으니 기억할 거라 믿어. 여자아이들은 자신은 분홍색이 안 어울린다며 울상을 지었고 남자아이들은 간지럽게 무슨 분홍이냐며 인상을 찌푸렸지. 그런데 모두가 불만을 터뜨릴 때 그저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유일한 사람이 너였어. 난 그런 네가 좋았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분홍색 티를 못 입을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묵묵히 티셔츠를 집어 들던 네가 좋았어.
분홍색 과티를 입고 창 밖으로 머리를 털고 있던 너는 잿빛 길과 회색 건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존재였어.
거기서 뭐해?
나 드라이기가 고장 나서 머리 말리고 있어.
학교 안 가? 늦었는데?
가야지 잠깐만 기다려 같이 가자!
드라이기가 고장 나 햇빛에 머리를 말리던 네가, 선명한 채도를 가지고 나를 마주 본 네가 진짜 좋았다 난.
그래서 나는 네가 사는 회색 건물 4와 내가 사는 회색 건물 3이 마주 보고 서 있는 그 길이 정말, 좋았다. 그 길을 걸을 때면 때때로 그 애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송이!'라고 내 이름을 불러줬고 그 길에서 조금 서성거리고 있노라면 매일같이 지각을 하던 너와 같이 등교를 할 수 있었지.
9년 전 소나기 내리던 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부끄럽고 설레고 아파. 붉어진 얼굴로 전한 손톱만 한 내 마음 모서리 한쪽과 매 순간이 최선이고 선했던 너의 모든 마음.
단 한 번도 그때를 후회한 적은 없어. 후회가 아닌 아쉬움은 있지만 말이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아닌 조금 더 예쁜 얼굴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아닌 밝게 웃는 표정으로 마음을 전했으면 조금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 어찌 되었든 내 삶에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이란 이름의 방문객이었고 난 그걸 최선을 다해 아껴주고 싶었거든.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네가 많이 생각나. 비가 올 때나 친구들과 연락을 할 때나 사랑 시를 볼 때나 아이들이 첫사랑 이야기를 물을 때나.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자주. 그렇다고 널 여전히 좋아한다거나 하는 건 아냐. 어쩌면 난 너를 사랑했던 그때의 아직 소녀였던 나를, 네가 좋아 어쩔 줄 모르던 풋풋한 그 마음을,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시간과 공간이 의미 있어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너에게 고백하던 단발머리의 그 아이가 그리워.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등번호와 너의 학교 번호가 같다는 걸 알고는 이건 운명이 아닐까 설레었던 그 어린 마음이 보고 싶어.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도, 혀를 아릿하게 만들던 커피의 뜨거움도 행복일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을 난 여전히 잊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어.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의 너와 나를 상상해. 난 여전히 큰 목소리로 여기저기 장난을 걸고 있을 테고 넌 조용히 앉아 그런 날 보며 웃고 있겠지. 몇 년이 흘러도,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을 우리의 관계가 너무나 소중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우리가 조금씩 늙어 그때의 젊음이 사라진 대도 그 시간들 속에서도 변하지 않을 너와 나의 모습을 난 계속해서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할게.
혹여나 오해할까 덧붙여. 다른 생각은 없어. 그냥,
난 그때의 공기와 날씨, 순간과 시간들, 나와 네가 너무 소중해 글로 남겨두고 싶었어. 단지 그것뿐이야.
인간의 뇌는 언젠가는 녹이 슬 테고 그 순간이 오면 이 다채로운 기억들도 점점 빛이 바래 질 테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활자로 남아있을 글로 이 기억들을 남겨두고 싶었어. 정말 그것뿐이야.
보고 싶었어 라고 말하면 나도 라고 답하는 인사말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아쉽고 서글픈 마음을 모두 담아 인사할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