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달래 Jun 04. 2020

2019년 9월 23일의 기록


 오늘은 따뜻한 기모 후드집업을 입었다. 치과에서 나오니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걸어보기로 했다. 바람이 쌀쌀한데 따뜻한 옷을 입었으니까.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세 방 맞았다. 치과를 나와서도 마취가 풀리지 않은 탓에 입술과 잇몸에 감각이 없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음료와 물을 주문해 진통제부터 삼켰다. 원래 약은 아프기 전에 먹어야 한다. 아프기 시작하고 먹으면 이미 늦은 거다. 입술이 얼마나 부었나 거울을 확인하는데 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취 탓에 무감각해진 입술과 턱은 물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걸음이 빠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같이 걷는 사람이 숨이 찰 정도로 속도가 빨라져있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생각을 하며 걸어보기로 했다. 생각을 하며 천천히. 바람이 쌀쌀한데 따뜻한 옷을 입었으니까. 오랜만에 지는 노을이 눈앞에 있으니까.


 집까지 약 두 시간이 걸리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매년 모르는 사이에 마취주사를 세 방씩 맞아온 건 아닐까. 그래서 얼얼하고 무감각해진 마음을 가지고 내가 뭘 흘렸는지도 모르고 뭘 놓쳤는지도 모르고 지나쳐온 건 아닐까. 마취가 풀리고 내가 흘리고 지나친 것에 부끄러워하고 슬퍼할라 치면 다시 마취주사 세 방. 다시 얼얼하고 무감각하게. 흘리고 놓치고 지나치고 그걸 모르고.


 눈앞의 노을이 너무 예뻐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공원 다리 위에서 나와 같은 각도로 노을을 찍고 있는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다시 걸음을 옮길 때까지 한참 동안 카메라에 노을을 담고 있는 학생을 지나치며 속으로 읊조렸다. 저 애는 낭만이 있는 삶을 살겠구나.


 공원에 있는 징검돌이 눈에 들어왔다. 송순이가 산책하는 공원에도 징검돌이 있다. 송순이는 항상 그 징검돌 위에서 흐르는 강물을 홀짝인다. 반가운 마음에 징검돌을 건너다 엉거주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뒤에서 '안 건너세요?' 묻는 소리에 황급히 징검돌을 마저 건너는데 뒤에서 아주머니가 사진 찍는 줄 알았으면 좀 더 기다릴 걸 그랬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더 죄송하다고 했더니 아니 제가 더 죄송하다고 하고 그래서 제가 더 죄송... 이러다 이름이 다송이 아니라 죄송이 될 것 같을 때쯤 고개를 꾸벅이고 다시 길을 걸었다. 사과가 귀해지는 요즘 세상에 하루에 이렇게 죄송을 많이 말하고 많이 듣는 게 얼마 만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돌아온 쪽을 한참 바라봤다고 한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려고. 걷는 길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지금껏 나는 너무 빨리 걸어 힘들었던 게 아닐까. 너무 당연한 말인가. 그 당연한 걸 나는 오늘 알았다. 천천히 걸으니 힘들지 않았다. 천천히. 쓰고 싶은 말이 많아진 걸 보니 가을이 오긴 왔나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