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영락없는 나의 축소판이었다. 쌍꺼풀, 입술, 심지어 발가락까지... 그렇게 나와 닮은 모습을 발견할 때면 짜릿했다.
딸의 눈빛은 정말이지 너무 깊었다.
딸이 보여주는 고요하고 깊은 눈빛을 마주할 때면, 나에게 어떠한 말을 전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지긋한 딸의 눈빛은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둥이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즐거움들에 길들여질 때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서곤 했다.
조금 더 크면 이렇게 여리고 사랑스러운 둥이들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을 테고, 그 과정에서 가족의 울타리를 답답해하며 아빠와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는 사실은 잊은 채,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변해갈 것에 대해 걱정했다.
자식들의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부모가 될 마음은 전혀 없다.
인생의 나침반이니 삶의 지혜이니 하는 말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결국 부모의 조언은 아이들에게 ‘간섭’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도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는 단순한 삶의 진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 필요한 것은 자식과의 거리 두기이다.
하지만, 인생이 언제 그리 명쾌하고 이성적으로만 흘러가던가.
설익고 어설퍼 보이는 자식이 명백히 틀려 보이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갈 때면 부모의 입장에서 ‘간섭’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과 “너도 자식 낳아봐야 알지”라는 말들은 참아낸다해도 무수한 선택의 길에서 수십 년간 살아온 부모의 경험도 삼켜낼 수 있을까?
물보다 진한 피로 이어진 부모와 자식 간의 끈적거리는 관계를 확인할 때면 진절머리 날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화살같이 뾰족한 말로 서로를 쏘아대며 한 동안 가슴 뻥 뚫린 채 살아갈 때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래도 내가 낳은 자식이니...”라는 한숨 섞인 부모의 말은 “그래도 나를 낳아준 부모님인데...”라는 단념하는 자식의 말과 만나 부모와 자식의 공간을 억지스럽게 채우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자식을 낳는 순간 마음의 탯줄을 끊어야 한다.
엄마와 연결되어 있던 탯줄은 가위로 싹둑 자를 수 있겠지만 마음의 탯줄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자식에 대한 무한 애정은 어떠한 식으로든 위험한 법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사춘기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게 한 것은, 그 존재를 온전히 독립케 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인연들이 그 존재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지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속에는 부모와의 끈적한 인연의 점도를 조금이나마 낮추는 시간도 포함이 되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 자식에 대한 마음의 탯줄을 온전히 부모 스스로의 힘만으로 끊어내야 한다면 너무 고되고 힘든 일이 아닐까?
아직은 품 안의 자식으로 둥이들을 품고 있지만, 눈과 마음에서 조금씩 덜어내며 마음의 탯줄에 작은 상처라도 낼 수 있는 자세를 배워나가야 한다.
다만 그 과정이 나에게는 서글픈 일이라 해도, 둥이들은 담담하게 지나갔으면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쿨하지 못한 아빠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