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정부 당시 미국의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에 익명의 미 고위 당국자의 보고서가 실렸다. <The Longer Telegram: Toward A New American China Strategy(더 긴 전보: 새로운 미국의 중국 전략을 위해)>라는 80장 분량의 보고서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민주주의 세계 전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시진핑 주석 교체를 미국의 대중 전략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제목은 1946년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보로 손꼽히는 조지 케넌의 Long Telegram(장문의 전보)에서 빌려온 제목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미국은 히틀러로 대표되는 파시스트를 같이 물리친 소련과 함께 세계 질서를 쉽게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한 소련의 확장욕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시기였기에 미국은 종전 후 동유럽과 한반도에서 부딪히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그저 상호 이해 부족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 시기 소련에서 근무하던 미국의 외교관이자 역사가였던 조지 케넌은 1946년 2월 22일 미국 외교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것이 바로 Long Telegram이었다.
일반적으로 짧게 구성된 전보에 비해 조지 케넌의 전보는 무려 5,540 단어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훗날 사람들은 그의 전보를 Long Telegram이라 명명한 것이었다.
조지 케넌은 1929년부터 독일에서 소련의 정세를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미국과 소련이 국교를 수립한 1933년부터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그는 누구보다 소련의 내밀한 속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깊은 통찰력을 지닌 외교관이었기에 그의 보고서는 장문이었지만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한 그의 논리는 명료했다.
당시 소련 지도부들은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해 국내적 투쟁과 외부의 위협에 맞서왔다고 케넌은 분석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자본주의 위협이 사라진 소련은 외부의 자본주의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독재 정권을 유지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즉, 소련 권력 내부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과 자본주의 사회의 대립과 경쟁은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경향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면서 장기적이면서 확고한 억제 전략, 즉 봉쇄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에서 봉쇄 전략의 등장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하며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국과 긴밀한 협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유럽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한 봉쇄 전략이 끈기 있게 유지된다면 소련은 결국 붕괴하거나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전보를 기조로 소련의 공산세력에게 위협받는 모든 지역에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내용의 트루먼 독트린이 완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 연방을 군사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NATO가 창설되었고,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서유럽의 경제를 지원하는 마셜 플랜도 수립되었다.
케넌의 Long Telegram은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면서, 소련의 붕괴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신호탄이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중국에 정신적 충격이자 체제 정당성을 위협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중국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전 세계에 중국의 비민주성과 인권유린의 실태를 드러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구 세계는 중국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기에 같은 공산국가였던 소련의 붕괴는 중국으로서 최대 위기를 맞이했음을 의미했다.
당시 중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덩샤오핑은 국내외적 위기의 상황에서 경제성장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외적으로는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국내적으로는 개혁개방을 가속화하여 경제건설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우한, 선전, 상하이 등을 순방하면서 개혁개방이 중국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모두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라 강조하는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나섰다.
덩샤오핑이 대내적으로 개혁개방을 강조했다면 중국이 나아가야 할 대외정책으로 제시한 것이 도광양회였다. 도광양회는 28자로 구성되어 있는 덩샤오핑이 제시한 지도 방침의 일부이다.
冷静观察(냉정관찰)
稳住阵脚(온주진각)
沉着应付(침착응부)
韬光养晦(도광양회)
善于藏拙(선우장졸)
决不当头(결부당두)
有所作为(유소작위)
먼저 ‘냉정한 관찰(冷静观察)’은, 중국이 어떤 입장을 내거나 행동을 취하기 전에 국제정세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또 변화되어 가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의미다. 동시에 스스로 내부의 질서와 역량을 공고히 하고(稳住阵脚), 중국의 국력과 이익을 고려해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며(沉着应付),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기르면서(韬光养晦), 능력이 없는 듯 낮은 기조를 유지하는 데 능숙해야 하고(善于藏拙), 절대로 앞에 나서서 우두머리가 되려 하지 말되(决不当头), 꼭 해야만 하는 일은 한다(有所作为)는 것이다.
- 중국 현대를 읽는 키워드 100
덩샤오핑은 '28자 방침'의 맨 마지막에 유소작위(有所作为: 꼭 해야만 하는 일은 한다)를 위치시켰다. 그리고 결부당두(决不当头: 절대로 앞에 나서서 우두머리가 되려 하지 않는다)를 그 앞에 위치시킴으로써 불리한 국제정세에서 중국이 나아가야 할 대외정책을 명확히 했다.
2012년 말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은 '중국몽'과 '일대일로'를 중국이 나아가야 할 전략으로 제시했다. 그는 "누구나 이상과 목표가 있으며, 스스로의 꿈을 갖고 있다. 현재 모두가 중국의 꿈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곧 중화민족의 근대 이후 가장 위대한 꿈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 년이 되는 2021년까지 '소강사회'(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사회, 즉 중산층 사회로 해석된다)를 건설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0주 년이 되는 2045년까지는 부강한 사회주의 현대화를 달성하겠다는 중국몽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다음의 3가지 필수 경로를 제시하였다.
첫째, 반드시 중국적 방식으로 한다. 이는 공산당 중심의 정치제제를 유지함을 뜻한다.
둘째, 중국 정신을 선양한다. 즉, 애국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족정신과 개혁과 창신(創新)을 핵심으로 하는 시대정신을 중국 정신으로 삼아 목표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셋째, 중국 역량을 응집한다. 즉, 56개 민족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대단결 시켜 소수민족의 이탈과 분열주의를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중국몽을 사회주의, 애국주의(민족주의), 민족 대단결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의미였다.
시진핑은 2013년 9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순방에 나서면서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일대)와 동남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일로)를 제시하였다. 시진핑의 일대일로는 중국몽의 대외비전이자 중국의 대외정책이었다.
일대일로의 완성은 60여 개국을 포함하는 거대 경제권의 구성, 대륙과 해양을 포함하여 60여 개의 국가 및 국제기구가 참가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을 연결하는 대규모 허브 건설 및 에너지 기반 시설 연결, 그리고 참여국 간의 투자 보증 및 통화스와프 확대 등의 금융 일체화를 갖춘 네트워크의 건설을 의미했다.
2049년 완성을 목표로 한 일대일로는 총 1조 400억 위안(약 185조 원)이 투입될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위해 중국은 400억 달러에 달하는 펀드를 마련하여 AIIB(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를 통해 인프라 구축을 뒷받침할 계획이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국으로 뻗어나가는 시진핑의 일대일로 전략이 제시되었을 때, 많은 국제관계를 다루는 외교 안보 전문가들은 중국이 덩샤오핑의 도광양회를 끝내고 중화주의의 발톱을 드러낸 것이라고 우려했다.
2022년 10월, 뉴욕타임스(NYT) 오피니언 면에 '땡큐, 시진핑(Thank You, Xi Jinping)'이라는 칼럼이 게재되었다. 언론계 최고의 명예라고 일컬어지는 퓰리처상의 수상자인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가 쓴 편지 형식의 글이었다.
이 칼럼에서 그는 시진핑 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풍자를 통해 시진핑의 독재정치 강화가 결국 자유 국가들에겐 축복이 될 것이라 하였다. 그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하드파워가 문화 등 소프트파워를 앞설 수 없다고 이야기한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중국은 무서운 국가로 받아들여지게 됐으나, 시 주석 당신의 권력이 강해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 주석 치하의 중국에서 하루라도 살고 싶을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며 "비록 미국의 시스템과 지도자들은 결점이 있고 과거의 장점들도 퇴색했지만, 시 주석 체제의 중국을 대안으로 삼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이 미국이 시 주석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라고 하였다.
정치 경제 이론 중 국가의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이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세이무어 마틴 립셋은 "Some Social Requisites of Democracy: Economic Development and Political Legitimacy(1959)"에서 경제 발전이 민주주의로 이어진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즉,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경제 발전은 민주주의의 선결 조건"이기에 "국가가 더 잘할수록 그 성공 가능성은 더 커진다"라고 하였다.
립셋의 이론에서 주목할 것은 경제적 기반이 결여된 민주주의는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국가 발전에 관한 근대화 이론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서면서 무서운 경제 성장을 이룩해 갔다. 수많은 미국인과 정치인들은 중국이 경제 발전을 이룩한 후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가 된 부강한 중국은 미국의 위협이 될 일이 없다는 안이한 생각에 중국의 경제 발전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립셋의 근대화 이론에서 예외적 국가였다. 시진핑의 집권 이후 중국은 경제 발전을 이룩한 국가가 더욱 강력한 독재 체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경제력이 강한 독재 국가는 필연적으로 주변국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는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2008년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당시 중국 유학생 친구들이 있었다. 공부하던 지역이 워싱턴 D.C. 였고 전공이 국제관계였기에 중국에서 온 친구들 중 상당수는 북경대 출신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항상 자신들이 북경대 출신임을 먼저 밝힌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친구 중 북경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칭화대 출신의 친구가 있었지만 그 친구는 한국인 특유의 겸손으로 칭화대 타이틀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나는 중국에서 북경대와 칭화대의 위상을 온전히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북경대 출신 엘리트들의 엄청난 자부심과 공격성을 직접 보았을 때는 충격이었다.
2008년은 미국이 글로벌 위기를 겪던 시기였고,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던 시기였다. 그로 인해 중국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자부심 위에 북경대 출신이라는 엘리트 의식까지 더해진 중국의 유학생들은 자신들의 국가, 즉 중국의 이익이나 정책에 반하는 주제가 나올 때는 매우 공격적으로 변하곤 했다.
그들의 공격성을 적나라하게 경험한 것은 수업 시간에 일어났다.
2008년 티베트에서 승려 등 600여 명이 중국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하였고, 중국 공안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국제 사회는 그와 같은 사태에 우려를 표했고, 서울 시내에서조차 중국 유학생들의 폭력이 발생하면서 언론에까지 보도되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미국의 듀크대에서는 중국 유학생이 티베트의 인권과 자유를 강조하면서 공개적으로 티베트를 지지한 일이 발생하였다. 중국의 애국주의 열풍으로 중국인들에게 '민족 반역자'로까지 낙인찍힌 그녀는 중국 중앙방송국(CCTV)까지 나서며 그녀를 '가장 추악한 유학생'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큰 화제였고, 국제 관계를 다루는 전공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토론으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중국인이 참석한 수업의 경우는 도무지 토론이 진행될 수 없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어버리곤 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토론이 제지된 적은 없었다. 그 어떠한 멍청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교수는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교수가 제지를 해야 할 정도로 중국 학생들의 일방적인 소란이 지속되었고, 심지어 교수의 제지조차도 무색할 만큼 중국 학생은 공격적이었다.
전체주의 공산국가에 세뇌당한 국민이 엘리트 의식까지 입혀져 국가의 나팔수가 된 장면을 적나라하게 경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인들에게 양안 문제를 포함한 '하나의 중국(One China Policy)'에 반하는 그 어떤 것도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경험은 역설적으로 중국이 결코 패권국이 될 수 없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해 주었다.
-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