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는 모든 분야에서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로 인해 로마는 수많은 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고,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폴리비오스도 <역사>라는 기록을 통해 로마가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이 된 이유를 서술하였다.
그는 로마의 정치 체제가 로마 제국의 성공 이유라고 생각하였다.
폴리비오스는 정치 체제가 왕정,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의 3 가지로 나뉜다고 봤다. 그러면서 왕정은 독재로 치닫고,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변질되며, 민주정은 중우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원시 왕정이 있었지만, 왕이 국가의 이익을 자신의 특권에 따르게 하면서 혁명으로 축출되고, 귀족들이 권력을 쟁취한다. 하지만 귀족은 다시 과두정으로 타락할 것이며, 대중이 들고일어나 정권을 뒤엎고 민주정을 세운다. 그러나 민주정 역시 중우정치로 변질되며, 사람들은 "강한 자"가 나타나 혼란을 바로잡고 자신들을 다스려줄 것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 순환을 로마는 겪지 않았다. 군주는 집정관 2명으로 대체되고, 귀족은 원로원이 맡으며, 민회는 민주정을 대표하였다. 이 3가지 정치 유형이 혼합된 결과, 변질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것이 로마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것이 폴리비오스의 주장이었다.
폴리비오스의 이러한 주장은 권력 분립, 정치적 균형과 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흔히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원조'라 알려진 아테네의 민주정을 "선장 없는 배"라 비판하였다. 그에게 대중은 변덕스럽고, 충동적이기에 공포 혹은 수사에 쉽게 흔들리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아테네는 '다수의 폭정'으로 불안정했지만 로마는 권력의 주체들이 권력을 나눠갖고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기에 안정적일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폴리비오스의 이러한 생각과 개념은 몽테스키외의 유명한 '삼권 분립'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몽테스키외의 사상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 헌법을 만들 때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미국의 헌법이 수많은 신생 국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점을 비추어볼 때 결국 폴리비오스의 <역사>는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체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역사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대외정책을 주도했던 외무장관 헨리 존 템플(파머스턴 경)은 "우리에겐 영원한 동맹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만이 영원하고 영구하며 그 이익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무이다(We have no eternal allies, and we have no perpetual enemies. Our interests are eternal and perpetual, and those interests it is our duty to follow.)"고 하였다(키신저가 주어만 바꾸어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
파머스턴 경은 쇄국 정책을 하는 국가에 대해선 무력을 통해서라도 강제 개방을 시켜 자유무역 질서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청과의 아편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철저한 현실주의에 기반한 그의 대외관은 개인의 신념이 아닌 영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외교 정책의 근간을 담은 것일 뿐이었다.
1차 아편전쟁 승리 이후 영국은 청으로부터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큰 경제적 이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의 수출품이었던 면직물은 청나라에서 인기가 없었기에 여전히 아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편 역시 청이 자체 생산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국의 무역적자가 커지기 시작할 때 2차 아편 전쟁의 발단이 되는 애로호 사건이 발생하였다.
1856년 10월, 광저우 앞 주강(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호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청나라 관원에 의하여 승무원 전원이 체포되고 영국 국기가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애로호는 중국인 소유였으며, 해적선으로 영국 국기를 달았고, 중국인 선원 13명과 영국인 선장 한 명이 있었다. 그러나 체포 당시 선장은 배 안에 없었고 중국인 선원 13명만 체포되었다. 바다의 안전을 위협하는 해적선을 단속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국기를 모욕한 혐의로 배상금과 사과문을 내라고 하였으나 당시의 양광 총독 엽명침(葉名琛)은 사건 당시 배에 영국 국기가 걸려 있지도 않았고 중국인 소유의 배이므로 영국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 애로호사건, 위키백과
영국은 애로호 사건이 발생하자 명예로운 자국의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언하였다. 명분이 크게 부족한 개전 사유로 영국의 하원조차도 전쟁 안건을 부결시켰지만, 당시 총리였던 헨리 존 템플(파머스턴 경)은 하원을 해산시켜 버리면서까지 개전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영국의 전쟁 선포에 프랑스도 자국의 선교사가 청에서 처형된 것을 구실로 전쟁을 선포하여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큰 아버지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이유가 영국과 적대한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영국과 동맹국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속셈까지 더해져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군을 형성하여 청을 공격하였고, 이후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프랑스는 영국의 최대 적국이었지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는 영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반면, 영국은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스페인을 돕기 위해 자국의 군대까지 보냈으나, 프랑스를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시키자 입장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중남미 지역의 국가들의 독립을 돕기 위해 영국군을 보내어 이번에는 스페인 군대와 맞서 싸우게 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스페인은 영국에 강력한 항의를 하였으나 영국은 개의치 않았다.
결국 중남미 식민지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스페인은 큰 타격을 받으면서 더 이상 영국을 위협하는 국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우리는 언제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가 되어 남의 휘둘림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라며 탄식했다.
그의 탄식에는 세계 패권국과 강대국에 휘둘리는 국가 지도자의 고민과 애환이 담겨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타국과의 동맹은 철저히 국가적 이익에 근거해야 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도 특정 국가에 대한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 끊임없는 혐오감이나 상습적인 호감을 갖는 국가는 어느 면에서 볼 때 노예국가나 다름없다. 그러한 국가는 적개심의 노예이든 혹은 애착심의 노예이든 간에 자국의 의무와 이익으로부터 자국민들을 오도하게 되는 것이다.
- George Washington, 고별 연설 중, 1796.
지난 200년이 넘는 시간에서 국제 질서를 좌우했던 대표적 국가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미국이었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누구보다 영국의 역사와 방식을 잘 알고 있는 국가였다. 미국은 패권국이 되는 과정에서 국제 질서를 좌우했던 국가들과 동맹과 적국을 반복해 왔다. 영국이 세계 패권국의 지위에 오를 동안 해 온 방식이었다.
1776년 미국이 독립한 이래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미국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 미국의 경계 대상 1순위 국가는 영국이었다. 또한 영국령 캐나다는 미국과 전쟁을 하여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까지 점령을 했던 국가였다. 미국이 러시아의 땅이었던 알래스카를 구입한 이유 중 하나가 캐나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찔러야 했던 적국이었다. 또한 중국과 소련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일본, 이탈리아와 함께 싸우는 동맹국이었지만, 그 후 한국 전쟁과 냉전에서는 싸워야 했던 가장 큰 적국이었다.
미국에 동맹은 과거 영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존재였다. 패권의 지위를 얻기 위해 혹은 자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적국은 언제든 손잡을 수 있는 동맹국이 될 수 있었고, 동맹국 또한 언제든 싸워 무찔러야 하는 적국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었고, 미국의 외교 역사였다. 그리고 이것이 한때 약소국에 불과했던 미국이 패권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국제정치의 본질은 현실주의에 있다. 그렇기에 영원한 동맹도, 그리고 영원한 적국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영국 혹은 미국처럼 세계 패권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강대국을 상대해야 하는 상대적 약소국에게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동맹과 적국이 변할 수 있다는 국제정치의 본질은 똑같이 작동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국가 중 하나가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관계로 수천 년간 중국에 복속과 독립의 과정을 반복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조공 책봉 관계는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의 청 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사라졌다.
베트남과 중국은 1950년대가 되어 두 나라에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가까워지게 된다. 중국은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당시 지원을 해 주었고, 1980년까지 약 200억 달러의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 원조도 제공해 주었다.
물론 이는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중국 공산당의 입지를 다지려고 한 이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후 베트남은 프랑스에서 독립을 하였지만 미국과 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도 중국은 베트남에 약 30만 명이 넘는 지원병을 파병하여 베트남 전쟁을 도우면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을 지원해 준 국가는 중국뿐 아니라 같은 공산국가였던 소련도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소련과 중국은 국경문제로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이에 대해 소련은 중국에 대한 핵 공격을 포함한 대대적인 군사작전까지 지시하였다.
다행히 극적인 협상으로 파국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 일은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는 결정적 이유로 작용하였다. 즉,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미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베트남은 미국과 손을 잡는 중국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과 손을 잡은 중국은 미국이 아닌 소련을 주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베트남에 미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조약을 맺으라고 강요하게 된다. 중국을 믿을 수 없게 된 베트남은 소련과 더욱 가까워졌고, 소련 주도의 경제협력 기구였던 코메콘(COMECON)에 가입까지 하였다.
위로는 소련, 그리고 아래로는 베트남에 포위된 형국을 맞이한 중국은 크게 분노하였고, 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고 경제 제재를 가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은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캄보디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팽창하려는 베트남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베트남 견제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결국 중국과 베트남도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40만 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베트남과 전쟁에 나선 중국이었지만 문화혁명으로 크게 힘을 잃은 중국은 생각처럼 베트남을 손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4주간의 전쟁으로 두 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뚜렷한 승자 없이 중국과 베트남 전쟁은 끝이 났다. 중국은 철군을 하였지만, 두 국가 사이의 국경 충돌은 1990년 초반까지 계속되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베트남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버틸 수 없던 베트남은 결국 캄보디아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하고 도이머이(쇄신) 정책으로 개방에 나서면서 경제 회복에 나서게 되었다.
베트남은 쇄신 정책을 실시하면서 자존심을 버리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나섰다. 그리고 중국 역시 같은 공산국가와의 대립이 지속되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좋지 않았기에 1991년 두 나라는 국교를 정상화하게 되었다. 또한 1999년 국경 조약을 맺으면서 국경 문제 역시 해결하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세계 해상수송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남중국해를 차지하려고 하는 중국의 대외정책으로 해상 경계 문제가 다시 대두되면서 두 나라는 여전한 긴장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9년간 베트남과 전쟁을 치른 미국은 베트남 수출의 약 30%를 차지하는 최대 수출국이 되었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2023년 베트남과 미국은 최고 수준의 양자관계를 맺게 된다.
지금까지 베트남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CSP ·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를 구축한 국가는 한국, 인도, 러시아, 중국 등 4개국뿐이다. 베트남은 조약 동맹국이 없는 국가로, 다른 나라와 ‘포괄적 동반자 관계’, ‘전략적 동반자 관계’,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등 3가지 형태의 양자 관계를 맺어왔다. 베트남은 10년 전 미국과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는데, 이번에 두 번째 단계를 건너뛰고 미국과 최고 수준의 양자 관계를 맺기로 한 것이다. 베트남이 양자 관계를 한 단계 격상하는 데는 통상 수년이 걸린다고 WP는 전했다. (조선비즈, 202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