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길이 없다

철학적 성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만남

by 이강언

철학적 성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만남


티베트의 심장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다람살라에서 몬순을 보낸 라마는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뉴델리로 가서 오후에 첸나이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곳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쉬람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밤새 달려가야 할 처지였다. 날이 어두워져 갈 무렵 기차 안에서는 차와 저녁 도시락을 파는 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라마는 저녁 식사를 따로 준비 못 한 탓에 기차 안에서 파는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기로 했다.


짜이 한 잔과 사모사 한 봉지를 사서 먹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저녁 내내 화장실 문고리와 씨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만의 화장실도 아님에랴. 라마는 결국 할 수 없이 중간역에 하차하고 말았다.


라마는 내리자마자 관리되지 않는 표정으로 엉덩이를 부여잡고 약국부터 찾았다. 다행히 약국 불빛의 은혜로운 이끄심과 자애로운 약사의 도움으로 라마의 배 속은 이 난감한 전쟁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송구스럽게도 그 어떤 신도 스승도 이 약사의 존재감에 미치진 못했다.


라마는 다시 기차역으로 가서 온몸을 숄로 똘똘 감고 대합실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하늘을 지붕 삼은 노숙은 면했지만, 이 또한 노숙이나 진배없었다. 허나 떠돌이 수행자가 세상에다 대고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날그날 주어진 여건에 감사히 몸을 맡길 수밖에.


다음 날 첸나이행 기차를 타고 여행의 나머지를 시작했다. 어제 그 표를 보여주며 역무원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수행자 행색을 참작해선지 자리도 하나 마련해주었다. 예정보다 하루 늦게 첸나이에 도착했지만 그건 기차나 달력의 입장에서나 그런 거라, 라마의 입장에서는 서둘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서둘지 않아도 가야 할 곳엔 가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 라마는 마침내 크리슈나무르티의 아쉬람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과 전혀 종교적인 편린을 찾아볼 수 없는 정갈한 건물들이 크리슈나무르티의 인간 됨을 느끼게 해주었다. 편하게 라마의 입장에서 아쉬람이라고 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크리슈나무르티 재단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로부터 스승이라는 호칭이나 역할을 거부했기에 애초부터 아쉬람이라는 명칭은 가당찮았다.


사실 그는 인도에서보다 서구에 더 잘 알려진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라마가 역에서부터 이곳을 물어물어 찾아오며 느낀 것도 그랬다. 대부분이 이곳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 릭샤 운전사들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는 라마가 만나본 영적인 스승 가운데 가장 비종교적이었다. 노년의 크리슈나무르티는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 같은 외모와 복장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도 이런 그의 비종교적인 태도가 신이나 스승에 매달리는 인도인들의 성향에는 그다지 잘 맞지 않아서 그럴 것이라고 라마는 추측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건기의 몇 달만 인도에서 머물렀고 나머지는 미국이나 스위스 등지에서 지내며 강연 계획에 따라 세계 곳곳을 누볐다. 마침 라마가 방문했을 때 다행스럽게도 크리슈나무르티는 이곳 첸나이에 체류 중이었다. 여든이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방문자들의 질문에 혼신으로 대화하는 모습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라마의 수행자 복장이 눈에 띄었는지 크리슈나무르티가 먼저 라마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저는 진정한 집을 찾고 있습니다.”

“진정한 집이란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당신을 속박하지 않는, 심지어 신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자유는 정확히 어떤 것입니까?”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 어떤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어떤 것이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당신의 생각이고 지식입니다. 그것이 당신을 제한하고 특정한 상태로 조건 짓습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좋습니다. 가령 당신이 인도인이고 힌두교도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파키스탄인이나 이슬람교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겠지요. 또한 당신이 믿는 신과 교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면 당신은 분노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신을 제한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걸까요?”

“그건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과 생각이 유사한 집단, 즉 민족이나 종교에 소속감을 느끼며 이것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마치 좁은 방안에 자신을 가둔 채 밖은 위험하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꼴이지요.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뒤로 숨습니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까?”

“교리에 갇히면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생각은 아는 것의 흐름이고 아는 것이 곧 지식입니다. 지식은 그 속성상 언제나 제한적입니다. 당신이 따르는 교리는 지식의 한 부분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있습니까?”

“길을 생각하면 도리어 길을 잃게 됩니다. 그곳은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길이 없다는 말이 라마를 아득하고 광활한 어떤 곳으로 던져 넣는 것 같았다.

“당신이 무엇을 알았건 미지의 영역은 끝없이 당신 앞에 펼쳐질 겁니다. 이미 안 것을 뒤로하고 끝없이 펼쳐진 미지를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자유로운 것이고 그곳이 바로 진정한 집입니다.”



신은 거기에 없었다


라마는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고 나오면서, 이번 여행 중에 힌두교 사원, 이슬람교 사원, 불교 사원, 기독교 사원, 자이나교 사원 등 많은 사원을 거쳤던 것이 생각났다. 이 모든 사원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그들이 만든 신상이나 신에 관한 생각은 다 달랐지만,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짓은 별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고 내면의 자유란 더더욱 먼 얘기로 보였다

.

그들은 기도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신에게 요구해댔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방증이 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나아지기를, 적어도 다음 생에서만큼은 더 나아지기를 신에게 기도했고, 부자들 또한 자신들이 더 부유해지기를 그리고 세세생생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신에게 기도했다.


사실 형식으로 보자면 더없이 간절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내용으로 보자면 신에게 능력을 증명해 보이라는 강요에 다름 아니었다. 제아무리 기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해도 어쨌거나 그것은 탐욕에 불과했다.


조금 나은 경우가 그나마 마음의 평화를 달라는 건데, 아마도 그들의 신은 이런 기도마저 들어주지 않나 보다.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들조차도 누군가 자신의 종교를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곧바로 격분하니까 말이다. 그들이 시간 맞춰 애써 신에게 기도하고 꽃과 돈을 갖다 바쳐도 그들의 바람이 이뤄지지 않는 걸로 봐서 신이 사원 안에 없는 건 확실해 보였다. 라마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종교 안에서 태어나 종교 안에서 자라왔기에, 거의 본능적으로 이처럼 기도하곤 했었기에 이해가 불가한 건 아니었다.


라마는 사원들을 거치면서 종교란 인간의 온갖 바람을 모아 오랫동안 다져 만든 단단한 정신적 구조물이라 크고 튼튼한 집을 허물기보다 되레 더 어렵다는 걸, 안타깝게도 믿음이 강할수록 더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크리슈나무르티가 종교에 갇히면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 말이 라마의 가슴에서 더 크게 울렸다. 그런데도 라마는 스스로 종교란 대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만 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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