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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언 Jul 04. 2022

인문학적 요가 수업

돌고 도는 설국열차처럼 삶도 돌고 돈다

이렇게 우리가 저지르는 행동을 까르마(कर्म, karma)라고 합니다. √kṛ(만들다)에서 온 말입니다. 단순하게는 행동, 행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까르마는 행위에 대한 결과를 내포하기에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을 역설하는 말이지요. 우리말로는 업(業)이나 업보(業報)로 번역합니다. 이런 식으로 일상어처럼 사용하지요. “다 네 업보다.” 


우리가 불쑥불쑥 습관처럼 저지르는 행동들은 자력 통제가 참 어렵지요? 그건 내면에 구조로 자리 잡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하게끔 만드는 힘을 상스까라(संस्कार, saṁskāra)라고 합니다. 이 말 또한 √kṛ(만들다)에서 온 말입니다.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sam이 더해졌지요. 잠행력, 잠세력 등으로 번역됩니다. 


예컨대 어린 시절에 가정이나 주변의 영향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 인종주의자로 성장했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상스까라가 되어 타인종에 대한 증오 범죄의 씨앗을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평소에는 평범하고 성실한 이웃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인종 관련 사건이 터지면 돌변해서 폭력을 휘둘러 까르마를 만듭니다.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까르마와 상스까라는 상호작용하며 서로의 자양분이 되어주지요. 까르마는 상스까라를 강화하고, 상스까라는 다시 까르마를 일으킵니다. 마치 설국열차가 일정한 궤도로 무한 순환하듯이 말이지요. 이런 순환을 상사라(संसार, saṁsāra)라고 합니다. 흔히 윤회(輪廻)라고 번역하지요. 윤회는 수레바퀴가 구른다는 뜻인데, 적절한 의역입니다. 상사라를 좀 더 직접적으로 풀자면 함께 흐른다는 뜻인데, √sṛ(흐르다)에서 온 말입니다. 


짐을 한가득 실은 수레처럼, 자신이 살면서 경험한 마음의 상처, 증오, 슬픔 그리고 기쁨과 환희의 기억들을 죄다 주렁주렁 매달고 버겁게 굴러갑니다. 그런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로 이어지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로 흘러갑니다. 이걸 확장하면 전생의 나는 현생의 나로 이어지고, 현생의 나는 내생의 나로 흘러갑니다. 상사라엔 끝이 없습니다.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로 이어지는 걸 콕 집어서 상따나(संतान, saṁtāna)라고 합니다. 상속(相續)으로 번역하는데, 재산 상속 같은 법률 용어로도 사용됩니다만, 본연의 뜻인 '뒤를 잇다' 또는 '다음 차례로 이어주다'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tan(늘이다)에서 온 말입니다. 같이(sam) 늘려주니까 똑같은 게 이어지겠지요? 그래서 상따나는 계속(繼續) 또는 지속(持續)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로 고스란히 상속(相續)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 역시 변화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천 년 전에도, 이름은 달랐겠지만, 한강이 있었고 지금도 흐릅니다. 지금의 한강이 천 년 전의 한강과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도 없지요. 한강 자체와 한강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변화를 거듭하지만 하나의 흐름으로써 한강의 정체성이 유지됩니다. 변화 속에서 이어지는 상속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나의 상속도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어제의 나를 물려받은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에게 무엇을 물려주는 게 바람직할까요? 티베트의 속담에 “모든 존재가 행복과 행복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조건들을 물려주기보다 행복과 행복의 조건을 물려주는 게 낫겠지요? 그럼, 내 안에 있는 행복과 행복의 조건을 계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가능하다고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이제 설국열차는 상사라의 궤도를 이탈할 겁니다. 꽉 잡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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