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눈빛은 생기를 잃은 꽃처럼 시들고 있었다
“형처럼 취직해서 일하는 사람이 너무나 부러워요”
아직 추위가 끝나지 않을 무렵인 3월 말 밤 대학교 후배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순간 몽니가 생겼다. ‘야 이 자식아 난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대학생인 네가 더 부러워’라는 말이 혀 끝까지 올라왔지만 도로 되삼켰다. 까끌한 느낌이 불쾌하게 내려갔지만, 저 말을 후배에게 내뱉는 순간 ‘젊은 꼰대’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 4학년인 후배, 어느 누구보다도 취업 준비라는 커다란 과제가 마음 한 켠에서 무겁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매일 고된 노동을 끝마치고 자취방 침대 위에서 녹은 치즈 흉내를 내면서 주말만 기다리는 나였지만, 취업을 앞둔 4학년의 심적 부담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육체적으로 피곤한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고, 꺼져가는 희망을 되살리려고 아등바등했던 취업 준비생의 마음은 쉽게 재단하기 어렵다.
추위가 끝나지 않았던 탓일까, 취업을 앞둔 그날이 떠올랐다. 2013년 12월 언론사 최종면접 날이었다. 비가 온 뒤 강추위가 이어지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고여있던 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나는 구두 뒷굽으로 얼음을 ‘탁탁’ 깨뜨리면서 복잡한 심정을 천천히 갈무리했다. ‘떨어지면 다시 새해를 맞게 된다’는 압박이 가장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어지는 생각은 한숨을 깊게 내쉬는 부모님 표정, 합격할지도 못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 돌아가는 내 모습이었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운 것을 모두 기억하고 곧바로 응용해버리는 수많은 수재들 속에서 한 없이 나는 평범했다. 내가 주어진 것은 남들과 똑같은 시간 속에서 열심히 책과 신문을 읽고 펜을 놀리는 것 뿐이었다. 게다가 같이 공부를 했던 친구들은 하나 둘 씩 경쟁의 관문을 뚫고 기자가 됐다.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급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최종 면접은 임원면접, 실기 테스트, 노조 면접 순으로 이어졌다. 임원면접에서 생각 외로 대답을 잘 했던 덕분에 기분이 고양돼 있었다. “인생에서 술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돌발 질문에 “혼자 마시면 쓰고, 둘이 마시면 깊고, 셋이서 마시면 즐겁다”라고 대답했을 때 임원들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저런 명언이 나왔는지 모른다. 그동안 쌓였던 노력과 운이 터져 나온 듯했다. 그리고 무난한 실기 테스트. 이제 2년 동안 준비했던 언론사 합격이 눈 앞에 다가왔다.
노조 면접에는 조별 토론이 이어졌다. 언론사 차장급 이하 노조원 2명과 7명의 면접자가 한 개의 조를 이뤘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다른 면접자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질문에 이어지는 대답, 사용하는 어휘, 수준 등을 유심히 봤다. 그때 조금 자만했을지도 모른다. 7명 중 낭중치추는 나였다. 내가 답변을 할 때마다 노조원과 면접자의 이목을 단 번에 사로잡았다. 내 답변이 이어질수록 노조원은 확신이 들어서는 표정이었고 반대로 다른 면접자들은 차차 어두워졌다.
마지막 순서였다. 면접관이었던 임 선배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봐라”라고 말했다. 그 순간 어쩌면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한 여자 면접자였다. 그녀의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반복된 실패로 체념이 섞여버린 눈빛이었다. 한창 꿈을 꾸고 희망을 띄어야 할 20대 청년이 가져야 할 눈빛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 그동안 고생했다고 한마디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 합격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 7명 중에 1∼2명만 합격의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위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순간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어떤 이유로 이같은 대답을 한 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우연히 마주쳤던 맞은편 눈빛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 역시 잦은 낙방으로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봤던 그 눈빛은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내 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답변을 들은 임 선배의 표정은 다소 미묘해졌다. 딱히 위로도 해주지 않았다.
그 날이 있은 뒤, 나는 당시 최종면접을 봤던 언론사에서 기자생활을 하게 됐다. 같은 조였던 7명 중에 기자 명함을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머지 6명은 다시 처절한 취업준비 생활로 돌아갔다. 이듬해 5월 영흥도로 떠난 엠티 자리에서 임 선배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임 선배는 내 마지막 한 마디가 많이 기억 남는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위로는 없었다. 하지만 임 선배의 그 한마디 속에 그동안 고생 많았노라고, 앞으로도 힘을 내라는 격려가 담겨있는 듯 했다.
어제 내게 전화를 한 후배는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었을 것이다. 위로와 격려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어도 희망을 잃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
“고생이 많다 강아.” 나는 이렇게라도 말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