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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1929~1989년)

1965년 봄 거리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정부의 한일협정 강행 때문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제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 한일회담을 성사하게 시키겠다고 하면서 한일기본조약을 성사시켰습니다.

한일 협정의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서른일곱살의 임종국은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친일문학론(1966년)>을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1942년 임종국은 경성공립농업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재학 중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어 8.15 광복을 맞았습니다.

겁이 많고 소심했던 성격이었던 임종국은 농업학교 학생이었음에도 거머리 때문에 모내기 실습을 힘겨워 하다 해방을 핑계로 등교 중단했습니다.

경성사범학교 시절엔 그저 책이 좋아 가입했던 독서 모임이 좌익성향인 걸 알게 되자 바로 탈퇴했습니다. 이에 독서 모임 회원들이 공산당에 가입하라며 압박하자 또 다시 등교 중단했습니다.

1947년 서울음악전문학원 첼로과에 입학해서도 모친과의 갈등으로 10개월 만에 중퇴하고 결국 1949년 경찰에 도피하듯 자원입대하고 맙니다. 하지만 카빈 소총을 들고 무장공비를 잡으러 다니면서도 꿈에서 인민군을 보면 비번으로 교대했던 여전히 겁이 많던 청년이었습니다.

얼마 후 발발한 한국 전쟁 땐 길가에 널브러진 또래 청년들의 시신을 보고 국방과 정치를 어떻게 다루었기에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못돼 경상도까지 밀린단 말인가? 라며 위정자들에게 분노합니다.

판검사가 되어 세상을 바꿔보겠단 결심도 해 보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시 공부도 중도 포기하면서 끝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때 절망의 끝에서 만난 한 명의 문학가 이상.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위적 거리고 있을 때 눈에 띈 것이 <이상 선집>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임종국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하면서 임종국은 그만 이상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실의 벽 앞에 도피와 자기 분열로 치달았던 작가 이상. 도피와 자기 분열, 임종국은 이상을 세상에 되살려내는 것으로 자신의 도피와 자기 분열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독학으로 완성한 '이상 전집(평론집)' 3권. 평단은 문학 평론가 임종국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임종국 자신이 주목한 건 자료수집 과정에서 알게 된 유명 작가들의 친일 행적들이었습니다.

내노라하던 60년대 문단 대가들의 거의 전부가 식민지 치하에서는 일본어로 성전(聖戰) 완수와 내선일체를 예찬하던 무리였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을 써서 친일파들의 친일 행적을 알리기로 작정했습니다.



8개월 동안 무려 2,000매 원고 안에 빼곡히 담겨지는 당시 유명 인사들의 이름들. 김동인, 노천명, 이광수, 모윤숙, 이효석 그리고 그에게 너무도 낯익은 이름  천도교 지도자였던 아버지 임문호. 임종국은 아버지가 친일 연설을 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로서 누구보다 철저하게 역사적 진실을 추적해 온 임종국에게 아버지의 친일 행적은 깊은 충격과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버지 이름을...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은데..." 학자로서의 객관성과 개인적 감정의 충돌이 임종국을 괴롭게 했습니다.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이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아버지 임문호의 일종의 인정(認定)과 회한(悔恨)이 섞인 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까지 담아 쓴 <친일문학론>. 임종국은 당연히 사회적 파장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소송도 반론도 심지어 비난도 그 어떤 것도 없는 무반응이었습니다. 당사자를 비롯한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주류사회는 모른 척했습니다. 발간 첫 해 초판 1,500부 중 500부만이 판매. 초판이 완판되는데 13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나마 1,000부는 일본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구매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잊혀져가는 <친일문학론>. 세상은 친일이 아닌 군사독재만 열을 올린 채 1970년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친일문학론>의 가치를 알아봤던 민주 운동가 백기완 선생.

"박정희 군사독재가 못된 짓을 할 때 그냥 군사독재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것이 제국주의 앞잡이 출신들이 자행하는 독재라는 걸 깨우치게 해 준 것이 바로 <친일문학론>이야.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들 무슨 문학가니, 작가니, 또 교수니 뭐 권력자니 이거 다 친일파거든" 백기완은 감옥에서도 친일문학론 보급에 앞장섭니다.

"그 책이 감옥 안으로 들어오기가 힘이 들었어. 그런데도 몰래몰래 들여다가 보면서 감옥에 번졌지. 그래서 이런 말도 들렸댔어. 친일문학론 판매사원이 백 아무개라고..."

유신 독재가 극단으로 치닫던 1970년대 말 민주화운동 인사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친일문학론>.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던 이들은 그제서야 군사독재 뒤에서 아른거리던 일제의 잔재, 친일의 잔재를 또렷하게 보게 됩니다.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에게 군사독재 뒤 친일의 뿌리를 알게 해준 <친일문학론>. 그 덕에 임종국은 친일 연구의 독보적 존재가 되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였습니다. 친일 연구가 드문 이유에 대한 임종국의 분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친일을 막연하게 스캔들 정도로 생각하면서 비방거리로 삼으려는 '대중적 경향', 당사자나 유족의 체면을 위해 덮어 두었으면 하는 '인정론', 오욕의 역사여서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은폐론', 특히 오욕의 역사라는 인식은 친일 문제엔 모두 입을 다물고 '영광의 독립운동사'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임종국에겐 오욕의 역사 역시 '역사'였습니다.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 3.1운동의 함성이 무성한 여름이라면 친일은 참담한 동면이다. 동면기를 모르고 건국이라는 맹아기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친일은 결코 은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욕의 역사까지를 직시해서 얻는 것 있는 그대로의 현실 진단,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진단해야 제대로 된 치료도 가능하다." 임종국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진단'을 위해 자료 수집에 광적으로 집착합니다. 심지어는 휴학 중인 중 2짜리 아들과 수개월간 도서관에 쳐박혀 <총독부 관보> '35년' 분 2만매 이상 복사했습니다. 복사가 어려운 매일신보 10년분은 일일이 필사했습니다.

증거를 대라며 찾아온 친일 인사의 후손이 자료를 보고 그냥 돌아갈 만큼 그가 모은 자료는 정확하고 방대했습니다. 하루는 베트남전 때 파월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이 임종국을 찾아왔습니다. 채명신의 처조부는 일본군에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의 거물 친일파인 문명기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채명신 부부가 사실 확인을 위해 찾아왔는데, 임종국이 내민 증거 자료를 확인한 뒤 이를 인정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일은 훗날 채명신이 간도특설대 출신인 백선엽의 원수 추대를 반대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료들을 통해 임종국이 내린 진단. 친일은 단지 친일파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흙탕물'을 걷어내기 위해 그가 준비한 필생의 역작 <친일파 총사(叢史)>. 공동 저자까지 섭외하여 집필에 박차를 가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돌보지 못했던 건강이 급격히 악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임종국은 결국 책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얻고자 했지만 지금의 나는 5평 서재 속에서 글을 쓰는 자유밖에 가진 것이 없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고독한 60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었어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 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임종국이 작성한 1만 2천장의 친일 인명카드. 2009년 11월 임종국이 떠나고 20년 후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마침내 친일 인명사전을 발간하게 됩니다.



임종국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역사학자, 연구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에 평생을 헌신하여 그 기초를 세우고 닦은 인물입니다. 재야사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주류 역사학계로부터도 인정받는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본래 재야사학은 역사학의 비전공자들이 주로 뛰어드는 관계로, 사료에 대한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거나 유사역사학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은데, 임종국은 방대한 양의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하나하나 꼼꼼히 분석하는 정성을 들이면서 그런 위험을 피해 갔기 때문입니다. 2005년에는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습니다.


출생 1929년 10월 26일

사망 1989년 11월 12일 한남동 

재동 심상소학교 졸업

경성공립농업학교 졸업

1952년에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다가 경제적 사정 때문에 2년 후 중퇴하였습니다.



저서

《이상 전집 1~3》 (1956)

《친일문학론》 (1966) - 임종국의 대표작

《흘러간 성좌》 (1966)

《발가벗고 온 총독》 (1970)

《한국문학의 사회사》 (1974)

《한국사회풍속야사》 (1980)

《정신대 실록》 (1981)

《일제침략과 친일파》 (1982)

《밤의 일제침략사》 (1984)

《일제 하의 사상 탄압》 (1986)

《한국문학의 민중사》 (1986)

《친일논설선집》 (1987)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 (1989)

《일제 침략과 친일 마적단》 (1991)

《실록 친일파》 (1991)

《친일, 그 과거와 현재》 (1994)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 1~2》 (1995)

《여심이 회오리치면》 (1995)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 (1995)

《또 망국을 할 것인가》 (1995)

《여인열전》 (2006)



임종국 평전(정운현)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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