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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장군 김홍일



1950년 7월 3일 새벽, 김광해 대위가 이끄는 수도사단 8연대 3대대 11중대는 새벽어둠을 이용해 나룻배와 통나무나 뗏목과 같은 부유물을 이용하여 조용히 한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M1 소총과 카빈총 그리고 M1919 경기관총 등의 빈약한 무장이었어도 병사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군화 끈을 단단히 묶고, 총기의 장전 소리도 최소화했습니다.

북한군은 여의도 비행장을 점령한 후 안심한 듯 방어 태세가 허술했습니다. 야간 경계 병력만 남아 있었고, 대부분은 깊은 밤이라 쉬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 한강 도하 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지 못한 북한군은 한국군의 상황과 한강 변의 전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하 날짜를 늦추었습니다. 6월 29일 도하 준비를 마친 북한군은 한강을 넘기 위해 여의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행장과 넓은 모래밭이 자리잡고있던 여의도는 북한군이 차지하게 될 경우, 강을 건너지 않고도 영등포를 통해 한강 이남으로 바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의도 비행장 주변은 혼성수도사단 8연대가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방어선을 펼쳤습니다.

6월 29일 8연대는 여의도 비행장 주변에서 북한군 제4사단 예하 부대의 야포 공격을 받아 여의도 비행장을 빼앗겼지만 다음날 다시 탈환하는 등 격전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8연대는 북한의 주공격 선인 여의도 도하를 저지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의 여의도 점령 시도는 계속되었고, 7월 1일까지 4회에 걸쳐 공격하였으며, 7월 2일 여의도를 점령하였습니다.




북한군의 여의도 점령은 한국군에게는 한강 저지선을 돌파당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반드시 여의도를 재탈환하여야만 했습니다.

11중대의 중대 작전은 1개 중대를 여의도에 투입하여 적을 격멸하고, 비행장을 확보하라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명령에 의한 작전이었습니다.




김광해 대위는 적이 점령한 비행장을 탈환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군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위기 속에 빠진 조국을 구출하기 위해 자기 한 몸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때와 장소에서 죽음을 택할 줄 아는 것이 바로 나라의 간성(干城,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나 인물을 이르는 말) 군인'이라는 강한 신념으로 두려움을 떨쳐냈습니다.




김광해 대위는 적을 완전히 기습하기 위해 북한군 진영의 후방에서 접근하도록 지휘했습니다.

선두 분대가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과 칼을 이용해 북한군 초병을 조용히 제거했고, 이어 중대 병력 전체가 조용히 비행장 주변을 포위했습니다.

김광해 대위의 돌격 외침과 함께 11중대는 일제히 기관총과 소총 사격을 퍼부으며 비행장으로 돌입했습니다. 북한군은 기습당해 혼란에 빠졌고, 일부는 비행장 건물 내부로 후퇴하며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비행장 내 격납고와 막사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며 돌입, 근접전이 벌어졌습니다.

7월 3일 새벽, 11중대는 여의도 비행장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살아남은 북한군은 한강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국군은 기뻐할 새도 없이 즉시 방어 태세를 점검하고, 추가적인 적의 반격에 대비해야만 했습니다.

여의도란 천혜의 거점을 빼앗긴 북한군은 엄청난 집중 포격을 퍼붓기 시작하고 비행장 탈환에 성공했던 우리 군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때의 포격은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하여 북한군으로부터 받은 가장 치열한 포격 중의 하나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11중대장 김광해 대위는 비행장 격납고로 대원들을 대피시켰으나, 그곳에도 맹렬한 포격이 가해져 격납고가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김광해 대위를 비롯한 수없는 장병들이 전사하고 생존한 몇몇 대원들만이 겨우 비행장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 전투는 한강선 방어전투 중 여의도 영등포 공방전이었습니다.




한강선 방어전투는 김홍일 장군 휘하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명령에 의한 방어전투로 1950년 6월 28일~7월 3일까지 6일간 국군이 한강 남안 24킬로미터에 달하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한 작전이었습니다.

북한은 전체적으로 남침 개시 22일 내지는 27일 안에 미국 개입 전에 남한 전체를 석권할 수 있다고 6.25 전쟁 직전 북한이 만든 남침 작전 도상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김홍일.jpg 광복군 참모장 시절 김홍일




김홍일 장군의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6.25 전쟁 당시 서울 함락 직후 한강 이남으로 붕괴된 채 후퇴한 국군 병력을 재편성 및 전선으로 복귀시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막기 위해 편성된 조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군단급 부대입니다. 1950년 6월 28일 설립되어 같은 해 7월 6일 지금의 제1군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예하 부대는 육군 제1, 2, 수도사단 그리고 독립 기갑연대였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붕괴된 국군의 잔존 병력을 끌어모아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한강 이남의 수비진을 구축했습니다. 6월 29일, 그와 방어 작전을 구상한 미군 중령 로버트 하제레트는 '미군 제24사단이 한강 선까지 진출하려면 적어도 3일 이상 필요하다. 3일 정도 한강 선에서 우리 국군이 지탱하면 미군이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라는 요청에 따라 그 두배인 6일간 한강 선을 방어했습니다.

6.25 초반 김홍일의 주도로 실행된 병력의 수습, 지연작전의 기획은 오늘날 국방부, 육군 등에서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는 업적이었습니다. 김홍일의 병력 수습과 지연작전은 이후 낙동강 방어전, 반격을 위한 전력 보전을 실현해 냈다는데 그 의의가 큽니다. 인천상륙작전의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원래 김홍일 장군은 6.25가 발발하자 김석원, 지청천, 이범석 등 경험 많은 숙장(宿將)들과 함께 한강 방어선 구축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한강 방어선은 국방부 장관 신성모, 참모총장 채병덕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채병덕은 한강 방어선 구축을 주장한 김홍일 장군에게 '늙은이가 자꾸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고 우긴다. 매번 지기만 한 장개석 군 장군이 무슨 장군이냐?'라고 하며 화를 내며 비아냥대기까지 했습니다. 전황은 심각해졌음에도 채병덕은 계속해서 수도사수, 북진통일만 주장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채병덕은 맥아더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 남한 장정 200만명을 동원하여 반격하겠다고 했으며 이를 들은 맥아더는 곧바로 채병덕의 경질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귀국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준장 계급을 수여받았습니다.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의 장군 임관자입니다. 이때 당시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초대 총참모장 이응준, 채병덕, 해군의 손원일이 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최초의 중장진급자이기도 합니다.

김홍일은 상해 임시정부에 있을 때 김구와 함께하면서 이봉창, 윤봉길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제작하여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김홍일 장군(1898년 9월 23일 ~ 1980년 8월 8일)은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의 독립과 국군 창설,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그는 '오성장군'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중국군에게서의 2성(二星) 계급과 한국군에게서의 3성(三星) 계급을 합한 데서 유래합니다.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난 김홍일은 오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황해도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생 비밀결사 사건으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중국으로 망명한 김홍일은 귀주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습니다.

1926년 상하이로 이동하여 중국 국민 혁명군에 입대, 북벌에 참여하였고, 용담 전투와 만가령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한국인 최초로 중국군 장성으로 진급하였습니다.




또한,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 의사의 1·8 도쿄 일왕 저격과 윤봉길 의사의 4·29 상하이 의거에 사용된 폭탄을 준비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1948년 귀국한 김홍일은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장군으로 임관하였고, 육군사관학교장을 역임하며 창군 초기 한국군의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에는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한강 방어선을 6일간 사수하여 미군 참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군사 지도자로 활약했던 김홍일 장군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적 성향을 비판했고, 특히 군을 정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했습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군에서 배제되면서 강제 전역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 김홍일 장군은 처음에 군사정권의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박정희가 의장으로 있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정권의 민간 이양을 어기고 박정희는 대선 출마를 선언합니다. 김홍일 장군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진다고 경고했습니다. 박정희 의장의 대선 출마가 기정 사실화되자 고문직을 내려놓고, 박정희의 출마 저지를 위해 전국적 연설을 전개하였습니다.

정계에 투신한 김홍일은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 체결을 반대하다 구속 기소됩니다.

1960~7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 세력과 접촉하며 독재 반대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유진산, 장준하, 김대중 같은 야당 인사들과 교류하며 독재에 저항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20여 개의 훈장(대한민국 을지훈장, 태극무공훈장, 건국훈장 독립장, 중화민국 충근(忠勤)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 <국방개론>, <군대정신교육>, <대륙의 분노>(자서전) 등이 있습니다.

1980년 8월 8일, 7대 광복회장 재임 중 83세의 나이로 타계하였고, 고인의 유지에 따라 사회장에서 가족장으로 축소하여 장례를 치르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독립운동, 국군 창설, 한국전쟁, 반독재 투쟁까지 김홍일 장군의 삶은 시대의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원칙을 끝까지 지키려 한 인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용기와 헌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경받고 있습니다.

힘을 가진 자가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느끼게 해준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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