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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 1872. 12.7~1933. 8.22)은 1932년 국제연맹이 영국의 리턴을 위원장으로 하여 파견한 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하였을 때 무명지를 끊어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는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동봉하여 전달,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국제연맹이 반대하는 괴뢰 만주국 성립을 강행하자 일제를 응징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33년 2월, 남자현은 이규동 등 동지들과 논의한 후, 3월 1일 만주국 건국기념일에 맞춰 주만주국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 암살을 결의했습니다. 그녀는 동지들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무기를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얼굴에 상처를 내고 거지로 변장한 채 목표지로 잠입했습니다.

만주국 일본 대사 무토 노부요시는 만주사변(1931년) 이후 관동군 사령관에서 만주국 대사로 부임하며,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만주는 조선과 중국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기에, 일본 측은 무토 노부요시에 대한 암살 시도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며 철통같은 경계망을 구축했습니다.




관동군은 무토 노부요시가 부임 및 이동할 때 특수 경호부대를 직접 배치했습니다. 열차, 차량, 숙소 등 모든 동선에 무장 헌병과 기마병을 배치해 이중, 삼중의 보호망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무토 노부요시가 이용할 하얼빈역과 철도 구간은 군사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선로 주변에는 철조망과 함께 저격수 및 순찰대를 배치해 원거리 공격을 차단했습니다. 이에 더해 만주 전역에 걸쳐 정찰 비행대를 운영해 독립군 부대의 동태를 감시했습니다.




더군다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철저한 검문망을 구축했습니다. 불심검문 강화하여 열차역 출입구, 시내 주요 도로, 여관, 시장 등 모든 구간에 검문소를 설치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며, 특히 거지, 장사꾼, 여행객 등 위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을 집중 조사했습니다. 여성이라 해도 예외 없이 몸수색을 실시했습니다.




첩보망을 운영하여 조선인 사회와 독립운동 단체에 밀정을 침투시켜 사전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무토 암살설이 돌자, 독립운동가들의 숙소와 아지트를 급습하며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일본군 특무기관은 만주 전역에서 주요 독립운동가의 움직임을 추적했습니다. 특히 조선족 마을과 중국 항일 단체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감시와 수색을 벌였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가를 잡기 위해 고액의 현상금을 걸어 지역 주민들의 밀고를 유도했습니다.




무토 노부요시가 하얼빈역에 도착하는 날, 역 주변 1km 구역을 전면 통제했습니다.

일반인의 출입을 전면 차단하고, 출입하는 모든 인원에게 이중 신분 검사와 소지품 검문을 실시했습니다. 역사 내부에는 헌병대와 무장경찰이 배치되어 총기, 폭탄, 칼 등 무기 소지 여부를 철저히 점검했습니다.

특히, 수상한 행색의 인물은 무조건 검문 대상으로 삼았기에, 거지로 위장한 남자현도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이 검문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 과정에서 그녀를 밀고하여 잡히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자가 있었는데, 바로 일제 밀정이자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 이종형이었습니다.

이종형은 일제강점기에 의열단 행세를 하며 관동군 촉탁 밀정을 지냈던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인지도는 비교적 낮지만 악행의 스케일로 따지면 노덕술, 하판락 같은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능가하는 최악의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체포되었을 당시 옷 속에 전사한 남편이 입었던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자현 의사는 일찍이 아버지의 제자였던 의성 김씨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했으나 김영주는 그녀가 23살 되던 1895년에 을미의병에 가담해서 경북 진보군 홍구동 전투에 나갔다가 그만 일본군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남자현은 죽으면서 아들에게 중국 돈 248원(현재가치: 약 3,500만원) 80전을 주면서 200원은 독립을 하면 독립 정부에 축하금으로 전달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1946년 첫 3.1운동 기념식에서 남자현이 남긴 돈 200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에게 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



1693_p.jpg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독립군의 어머니, 여자 안중근, 만주 투쟁의 여걸로 불리는 남자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대한독립군을 지원하고, 무장투쟁을 도왔으며, 직접적인 항일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20~30년대 만주 항일무장 운동 진영의 유일한 여성 대원으로 꼽힙니다.




남자현은 187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고, 19세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자현은 외아들 김선태(金善台)를 홀로 키우며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자신의 삶을 조국의 해방을 위해 바쳤습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할머니의 몸으로 아들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만주에 도착한 자현은 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으며 자신은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무장 투쟁과 함께 여성 계몽 운동에도 힘썼습니다. 그때 남자현의 나이 48세, 지금으로 치면 환갑이나 다름없는 나이였습니다.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서는 여자의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북만주 일대에 12개의 교회를 세우고 액목, 화전, 반석 등지에 20개가 넘는 여성 교육 기관을 세우는 등 만주에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만주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군자금 모집뿐만 아니라, 정보 수집, 독립군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독립군을 위한 비밀 연락책 역할도 수행했으며, 직접 무장 투쟁에도 가담했습니다.

청산리 대첩의 부상자 10여명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비판하고(당시 해외 항일 투쟁의 성지였던 만주에는 약 90여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3번이나 단지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각각 조국이 식민지가 되었음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 민족끼리 싸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독립을 원하는 간절함을 담았다고 전해집니다.




1926년 순종의 장례식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위해 경성부에 잠입하였지만 거사 직전에 송학선 의사가 먼저 의거를 일으키는 바람에 경계가 강화되어 다시 만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1919년 조선 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는 '조선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라 민족혼과 문화를 잃게 만들고 조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가르침으로써 조선 청년들이 부조(父祖,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는 조상)를 멸시하도록 가르쳐라 이것이 조선인들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라며 조선인을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1931년에는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방문했을 때 왼손 무명지를 잘라 혈서를 써서 전달하며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1933년 주만주국 일본 대사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을 기획하였습니다. 거사 일이 되어 얼굴에 상처를 내고 거지로 분장하여 잠입하였으나 삼엄한 경계 속에 불심 검문에 걸려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 이후 5일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자현은 62세의 일기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여성 중 가장 높은 등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입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모델입니다. 덕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임에도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남자현 의사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다소 환기되었습니다.

이후 생가가 조성되고 남자현 의사 기적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암살 개봉 이후 경상북도 우정청이 호국 영웅 우표 도안으로 주시경과 함께 안동 출신의 남자현을 포함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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