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오전 4~5시를 기해 북한 2군단 예하 2사단은 강원도 춘천으로, 12사단은 인제, 홍천 방면으로 각각 내려왔습니다.
북한 2사단은 춘천 점령을 목표로 하고 12사단은 인제, 홍천 점령을 목표로 하여 국군 6사단의 퇴로를 차단, 섬멸하여 여주, 용인 거쳐 수원까지 진격 노렸던 것입니다.
이는 먼저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수도권에서 북한군의 주공(主功)을 막아내는 국군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북한 2개 사단의 병력은 2만 3천여명, 화포 200여문이었고, 이에 반해 국군 6사단의 병력은 9천 3백여 명, 화포 90여문이었습니다.
당시 국군 6사단은 춘천을 중심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7연대, 16 포병대대는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고, 2연대는 북한 12사단을 방어했습니다.
원주에 배치된 19연대는 대기 상태로 북한군 남침 시 즉시 투입 예정이었습니다.
북한군은 춘천시 사북면 인람리와 지암리에 위치한 국군 6사단 전초 진지들을 향해 공격준비사격을 30여분간 퍼부은 뒤, T-34 전차와 SU-76 M 자주포를 앞세우고 남진을 시작했습니다. 전초 진지들을 박살 낸 북한군 2사단 6연대는 곧장 자주포 10대를 앞세우고 국군 7연대 1대대가 배치된 북한강 옥산포로 공격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논밭에서 정면으로 들어오는 실책을 저질렀고, 이에 포격으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군 6사단 7연대 대전차 포대 2소대장 심일 소위는 백철원, 김순화, 윤봉국 등 대전차 포대원과 함께 37mm 대전차포(미국제 M3) 일부와 57mm 무반동총을 운용하며 야산과 도로변에 매복하여 북한군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37mm 대전차포는 SU-76M 자주포를 격파하기엔 화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적 전차의 측면을 노리는 전법을 사용하거나, 지형을 이용해 접근을 차단하며 싸울 예정이었습니다. 대전차 지뢰 및 화염병도 준비했습니다.
심일 소위와 소대원들은 전차가 접근하는 소리와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을 감지하며 순간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SU-76 자주포가 전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심일 소위는 전투 개시 명령을 하달합니다.
심일 소대는 조선인민군의 SU-76 자주포 2~3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전공은 순식간에 전군에 알려져 조선인민군의 전차 및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노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소양강을 도하하지 못한 채 7연대 1대대에게 북한강까지 쫓겨갔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북한군 2사단장은 예비로 둔 17연대까지 투입했습니다.
6월 26일 오전, 7연대 1대대는 지원 포격과 원주에서 우두산 진지로 이동해 온 19연대 2대대의 측방 엄호사격 속에서 옥산포로 집결 중이던 북한군 대대 하나를 기습 공격해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북한 2군단장은 홍천 방향으로 향하던 12사단의 일부를 춘천 방향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후 북한군은 오후 1시 공격준비사격 후 재공세를 폈고, 이에 국군 7연대는 오후 3시경 사단장의 명령으로 일단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6월 27일 오전 5시 지원 포격 속에서 북한군은 소양강을 걸어서 건넜거나 소양교로 공격해 왔고 국군은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1시 30분경 봉의산 정상부가 피탈 당하자 7연대 병력들은 일제히 춘천 시내로 후퇴하였습니다.
이 무렵 국군 6사단은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서부전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시흥군으로 철수했으니 이에 6사단은 사단장의 판단에 따라 철수하면서 중앙선을 중심으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북한군은 춘천 외곽을 장악했지만, 국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시내 돌파에 실패했습니다. 북한군은 증원 병력을 추가 투입하며 춘천을 포위했고, 국군은 탄약 및 병력 손실 증가로 방어 지속이 어려워졌습니다.
6월 27일, 김종오 사단장은 질서 있는 후퇴 명령을 내리고 홍천 방향으로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남하하는 과정에서 국군 2연대는 전력이 3분의 1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6월 27일 계속 얻어터지는 2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19연대 주력과 16 포병대대가 구원군으로 가세해 말고개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로 했고, 일대에서 쌍방 포격이 이어집니다.
6월 28일 새벽, 국군 2연대 1대대가 일대 고지군의 북한군을 격퇴하다 포격 세례를 받자 후퇴했습니다. 이 무렵 북한군 12사단은 국군 2연대를 계속 밀어내며 인제 남방과 큰말고개까지 진출해 국군 6사단의 퇴로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춘천을 맡았던 북한 2사단이 16 포병대대에게 전멸하자 북한 2군단장은 춘천을 우선 점령하라고 지시해 12사단은 해당 방향으로의 진출을 멈추고 큰말고개에 예비로 남겨둔 연대와 함께 춘천으로 향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큰말고개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 2연대와 19연대 3대대는 육탄 11용사의 활약으로 적 자주포(SU-76 M), 전차(T-34) 10대를 격파 또는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들은 일본군 출신인 19연대장 민병권 중령의 지침에 따라 길가에 쓰러져 죽은 시체로 위장했으며, 오전 10시경 접근 중인 적 전차가 아군의 대전차포에 맞고 쏜 위치를 확인하려고 멈춘 순간 기습을 가했습니다.
우선 1번조인 19연대 3대대 소속 조달진 일병이 선두 전차의 해치를 열고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같이 까 넣어 기동 불능으로 만들어 후속 전차들까지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미의 전차장이 고개를 내밀어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는 순간 아군 기관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직후 11용사 중 한 명이 그 전차 안에 수류탄을 까 넣었고, 이로 인해 행렬 중간의 전차들은 앞뒤가 가로막힌 채 고립되었습니다. 이후 이 전차들은 승무원들이 상황을 확인하려고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온 순간 혹은 강제로 해치가 열려 차례차례 정리되었습니다. 이후 조달진 일병을 포함한 3명은 2계급 특진을, 나머지는 1계급 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6월 29일 춘천을 정리한 북한군은 국군 2, 19연대를 포위하기 위해 홍천으로 향하며 개중 일부는 우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군 6사단장은 반격 작전을 하려던 2연대에게 철수를 명령해 횡성과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후퇴합니다.
6사단 사상자는 407명이며, 인민군 출신 귀순자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 제2군단의 사상자는 2,000여명(6사단 자체 집계로는 6,900여명)이며, 다수의 SU-76 자주포와 BA-64 장갑차가 격파되었고, T-34/85도 몇 대가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국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전략은 무산되었습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제2군단 군단장 김광협과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전우가 해임되었습니다.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의 남하를 최대한 늦추면서, 후방의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특히 김종오 대령의 기동전 및 방어전 전술이 돋보였으며, 개전 초기 국군이 효과적으로 대응했던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김종오 장군의 일대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921년 5월 22일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외천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에는 부용면 부강리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일본 주오(中央) 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독립한 조국으로 귀국한 그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월 28일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현재의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6.25 전쟁 발발 불과 2주 전인 1950년 6월 10일 춘천시 - 인제군 지역의 38선 경비 임무를 담당하는 제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6사단을 지휘, 춘천-홍천 전투에서 사단 작전지역 내에 존재하는 천연 장애물인 소양강과 북한강, 홍천 큰말고개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조선인민군의 남진을 저지, 북한의 전쟁 초기 전략을 좌절시키고 동시에 국군 주력 부대들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이 참전할 수 있을 시간을 버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향후 전쟁의 양상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이미 상황이 끝나 UN군이 참전할 가치를 못 느꼈다면 대한민국은 현존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니 그의 공로는 대단히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계속 벌이던 와중 일어난 동락리 전투(음성 무극리 전투)에서 휘하 7연대 2대대가 단독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 전멸시켜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참고로 이 전투는 육군이 최초로 인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그 뒤 계속 남하하며 수안보, 이화령 전투 등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계속 지연시켰고,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그는 1950년 7월 15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습니다.
그 뒤 낙동강 부근에 최후의 방어선이 형성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영천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의 6사단은 신녕(新寧) 지구에서 북한군 8사단의 공세를 안정적으로 저지하여 영천 방면의 아군이 실시할 반격 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해 국군과 UN군이 북진을 공격적으로 하는 와중 7연대 1대대가 10월 26일에 최초로 압록강 변 초산을 점령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후송당했습니다.
문제는 사단장이 부상당한 때에 중공군이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6사단은 초산에서 후퇴하다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7연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병력만 분산 철수해서 전투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김종오 장군의 첫 번째 대 패배였습니다.
부상에서 회복된 후에는 3사단장을 맡았지만, 곧바로 참가한 현리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패배의 책임은 그의 상관인 3군단장 유재흥에게 돌아갔습니다. 유재흥이 연락기를 타고 군단 본부로 돌아가자 이를 본 장병들 사이엔 3군단장이 도망쳤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습니다.
현리 전투는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2일까지 강원도 인제군 현리지구 근방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과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군단 자체가 해체될 정도였기에 대한민국 국군에서 6.25 전쟁기 가장 참담한 패전 중 하나로 꼽는 전투입니다. 현리전투를 계기로 전투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미군에게 모두 박탈당했습니다.
원균의 칠천량 해전과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패전사 중 하나입니다.
칠천량 해전은 이순신이 구축해 놓은 막강한 해군 전력 중 판옥선 100여 척이 가라앉고 수군 일만여 명의 손실이 있었습니다. 판옥선 12척을 남겨놓고 수군이 거의 궤멸된 치욕적인 해전이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벌어진 쌍령전투는 조선의 4만여 병력이 청군 기병 300여 명의 병력에게 패했습니다. 기병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보다는 무질서하게 도망가다 압사당한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이후 중공군의 남하로 전선이 교착됨과 동시에 휴전 협상이 진행되자 휴전 후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기 위해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952년 5월 김종오 장군은 중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지역을 담당하는 9사단장에 임명됐습니다. 김종오 장군은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이 일어났던 곳 중의 하나인 백마고지 전투를 진두지휘하였습니다.
1952년 10월 철원 북방의 395고지(후에 백마고지로 명명됨)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12회에 걸친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사투를 벌여 10월 15일 최종적으로 중공군을 격퇴, 이 고지를 사수하였습니다. 백마고지 신화를 창조해낸 그는 이후 휴전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직, 정예 초급간부 육성에 매진하였습니다.
휴전 후 그는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1954년 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교육 총본부(현재 교육사령부의 전신) 총장,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습니다.
김종오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인 1962년 1월 국군 사상 다섯 번째로 대장으로 진급하였습니다.
1965년 4월 19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1년 후인 1966년 3월 30일 오전 9시 25분, 신당동 자택에서 지병인 폐종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향년 46세.
그는 임종하면서 "더 일할 나이에 조국 통일도 못 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고 죄송할 뿐이다. 모름지기 평생의 소원인 통일 성업을 꼭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 명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로 1983년 국방부 선정 4대 영웅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전쟁 초반의 지연 방어를 진두지휘했던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김홍일 장군, 6.25 개전 직후 춘천 전투에서 북한군 선봉 부대의 남침을 포격으로 저지한 6사단장 김종오 대령,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으로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월턴 워커가 6.25 전쟁 4대 영웅입니다.
다만 제6사단은 전쟁 초반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당시 6사단은 횡성에서부터 출발하며 퇴각로마다 무수한 대량학살을 벌였습니다. 특히 수만의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던 충북 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습니다. 이 책임은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종오 장군 역시 지고 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서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였습니다. 이 단체는 친(親)대한민국, 반(反)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향을 분명히 하였고 이를 위해서 좌익 용의자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을 가입시켰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6.25 전쟁 직전 연맹원이 33만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국민보도연맹은 실제 남로당 세력을 약화하는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남로당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연맹원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로당과 무관한 일반인들이 상당수였습니다. 공무원들의 건수 올리기 실적주의 때문에 가입에 강제 수단이 포함되어 있었고 경미한 단순 동조자, 좌익 경력자가 아닌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쌀이나 비료 준다는 말에 가입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 연맹원들에 대한 정권의 대량 학살이 이루어집니다. 학살 피해자를 최대 30만 명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으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약 10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안타까운 역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