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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 사이토를 저격한 청년 같은 노인 강우규





태양이 서쪽 하늘로 기울며 붉게 물든 노을이 서서히 퍼지고 있었던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 역(훗날의 서울역) 앞은 평소와는 달리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해 번잡했습니다.

제3대 신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습니다. 수천 군중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가 조선인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사이토의 환영 행렬에 참석해야 했던 것입니다.

전차가 철길 위를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상인들은 노점에서 호떡과 국밥을 팔고 있었습니다. 매캐한 석탄 냄새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공기가 무거웠습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3·1 운동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한 그해 가을, 한 남자가 군중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바로 64세의 강우규였습니다.

올해 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만 명이 목숨을 걸고 거리에 나섰으나, 일본은 피로 그 외침을 짓눌렀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조국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습니다.



강우규 의사.jpg 강우규 의사



그는 러시아제 수류탄을 명주 수건에 싼 뒤 허리에 묶고 그 위에 저고리와 흰 모시 두루마기를 입었습니다. 검은 띠의 페도라를 쓰고 가죽으로 만든 조선 신발을 신고 손에 양산 및 서양식 수건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어 허형과 남대문 밖 중국요리점에서 같이 점심을 한 후 거사 장소로 향하였습니다. 총독 도착 1시간 전, 그는 거사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총독이 귀빈실을 거쳐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귀빈실 근처로 자리를 옮겨 총독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인근 거리는 일본군 헌병과 순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평온한 일상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날 군 당국은 신임 총독 환영식을 위해 기병 1개 중대의 의장대와 보병 제78연대 소속 보병 2개 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오후 5시가 지나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대문 정거장에서 조선 총독 일행이 마침 기차에서 내려 귀빈실을 거쳐 전방 출입구로 나왔습니다. 사이토 마코토가 자기 부인과 비서관 이토 타케히코(伊藤武彦) 등과 함께 마차에 오르자, 강우규는 즉시 갖고 있던 신문 지면상 총독의 사진과 동일 인물임을 확인했습니다.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그는 수류탄을 힘껏 던졌습니다. 그러나 수류탄은 마차에서 약 12~13m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였습니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튄 파편 몇 조각은 총독의 혁대에 박혔으나 총독은 무사하였습니다. 정작 사이토 마코토는 그가 입고 있던 두꺼운 일본 해군복의 혁대 덕분에 파편 몇 조각이 혁대에 박혔을 뿐, 부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다만,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와 정무총감인 미즈노 렌타로, 시카고시장의 딸이었던 해리슨 부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장인 구보 요조(久保要藏), 호위 군경, 조선총독부 관리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중 오사카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와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末弘又二郞)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습니다.




미즈노 렌타로는 젊은 시절 민비 시해에 가담한 을미사변의 원흉이었습니다. 1923년 도쿄, 요코하마를 아우르는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무너진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즉 일본 내의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고 일본인을 결집시키기 위해, 조선인을 악인으로 몰아 공공의 적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조선인을 모함하는 아래 내용의 공문을 관동 지방의 각 경찰서에 하달했습니다.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를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이 계획을 획책한 당시 일본의 내무대신이 미즈노 렌타로였습니다.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의 지시가 하달되자 일본 경찰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쇼리키 마쓰타로 당시 경시청 관방주사가 이렇게 보도지침을 내렸습니다.


<조선인이 일본인을 죽이고 약탈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독이 든 만두를 일본인에게 먹인다. 조선인들의 저주로 지진이 일어났다.>


기자들은 쇼리키 마쓰타로의 거짓말을 기사로 작성하여 보도했고 기사를 본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했습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일본도로, 죽창으로, 몽둥이로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임시정부 산하 기관지 <독립신문>에 따르면 죽은 조선인은 6천여명이 넘었고(6,661명), 독일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2만여 명이 넘었습니다(23,059명).




일본 경찰들은 강우규를 체포했다가 '설마 노인이…'라는 생각에 풀어줬다고 합니다. 혼비백산하는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온 강우규는 안국동의 김종호, 사직동의 임승화, 가회동의 장익규 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다시금 의거를 계획하지만, 9월 17일 목격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장익규의 집에서 친일 경찰 김태석에 의해 체포됩니다. 김태석은 당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의 경부(警部)로, 후일 의열단에서 ‘칠가살(七可殺)’ 대상자 가운데 1명으로 지목되었고,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 친일 경찰이였습니다.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 상고하였으나,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 이어 5월 27일 고등법원(高等法院, 오늘날의 대법원에 해당)에서도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는 3심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상고이유서 역시 그가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상고이유서에 보면 그가 총독을 처단하고자 하는 것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는 65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순국합니다.

강우규는 사형 집행 당시 '감상이 어떠하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다음과 같은 사세시(辭世詩, 사람이 죽으면서 남긴 시)를 남깁니다.


단두대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有身無國 豈無感想)


강우규의 남대문 역 투탄사건은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의열투쟁이었습니다. 이 의거는 이후 의열단(義烈團)으로 계승되면서 1920년대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자리 잡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강우규(姜宇奎, 1855년 7월 14일 ~ 1920년 11월 29일)는 1855년 7월 14일(음력 6월 1일) 평안도 덕천군 무릉방 제남리(현 평안남도 덕천시 제남동)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강재장(姜齋長)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진주고, 호는 왈우(曰愚)입니다. 슬하에 중건(重健)·건형(鍵衡)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1883년 함경도 홍원현(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하였으며, 홍원현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25년간 한약방과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많은 재산이 모이자,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계기는 이동휘(李東輝)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08년 이동휘는 신민회(新民會) 활동의 일환으로 함경도 지역을 순회하며 기독교 선교활동과 함께 학교설립을 통한 구국 교육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동휘를 만난 그는 감화받아 기독교에 입문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영명학교(靈明學校)와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0년 8월 강우규는 경술국치로 인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했고, 1911년 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청나라 길림성 화룡현 두도구(頭道溝)로 망명했습니다. 이후 길림성과 동부 시베리아, 연해주, 흑룡강성 일대를 방랑하면서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하여 갔습니다.

1917년 우수리강 대안의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요하현(饒河縣)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북만주에 위치한 이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 강우규는 이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강우규는 사립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노력하였습니다.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전개하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소식은 바로 3·1운동이었습니다. 1919년 3월경 국내의 만세 시위 소식을 접한 그는 요하현 신흥동의 동포 400~500여 명을 모아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4~5월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에 가입하고 요하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노인동맹단은 3·1운동 직후인 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김치보(金致寶)의 집에서 조직한 단체로 다른 독립운동단체와는 달리 회원의 나이를 46~70세까지로 연령 제한을 둔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독립운동 청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사이토 신임 총독을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원산을 거쳐 경성에 잠입한 뒤,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 역에 도착하여 마차에 오르던 순간 폭탄을 투척하여 총독 폭살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폭탄은 총독 마차 옆에서 폭발하여 37명의 부상자를 내는 데 그치고 사이토 마코토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무단 통치로 한국민을 철저히 탄압하였는데, 그 결과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족적 항일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일제는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파면하고, 사이토를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현역 해군 대장인 사이토는 부임하기 전에 이미 한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 정치를 표방하여 내외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강우규는 의열투쟁의 선구자로 평가되며, 안중근·윤봉길 의사와 함께 무장 독립운동의 3대 거사로 꼽힙니다.

그의 거사는 3·1 운동 직후 침체한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후 의열단 등 무장 투쟁 단체 결성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흉상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부는 그의 희생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강우규 의사의 삶은 '목숨으로 민족의 자존을 지킨 의인'이라는 말로 압축됩니다. 그의 희생과 신념은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jpg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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