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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을 피습한 이재명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경, 차가운 겨울바람이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오늘날 명동성당) 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침부터 뿌려진 가느다란 눈발이 녹지 못한 채 길모퉁이에 희끗희끗 쌓여 있었습니다.

성당의 붉은 벽돌은 칼바람에 할퀴인 상처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얀 고딕 양식 첨탑이 맑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고, 아치형 창문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광장 위를 스쳐 갔습니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신자들과 행인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걸친 사람들은 손을 호호 불며 성당을 드나들었고, 길가의 노점상들은 연신 손을 비벼가며 장사를 이어갔습니다.

성당 계단 아래에서는 군밤을 굽는 탄 냄새가 스민 하얀 연기가 북바람에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군밤을 굽는 작은 화로 앞에 한 남자가 묵묵히 군밤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재명이었습니다.




이재명은 짙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채,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황철 난로의 열기에 손을 녹이는 척하며 한 곳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성당 입구였습니다.

칼날을 감춘 두꺼운 누비옷 속 가슴팍에 잇닿은 심장이 쇠망치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뛰었습니다. 이재명은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폐 끝까지 차오른 공기가 묵직했습니다. 손끝이 차가웠습니다. 하지만 땀방울이 천천히 손바닥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온 신경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선이 번뜩였습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완용이 성당에서 나왔습니다.




회색 모피 외투를 걸치고, 중절모를 쓴 그는 여느 때처럼 의기양양했습니다. 수행원 몇 명이 그를 따랐고, 금박 단청이 벗겨진 청룡 문양의 인력거가 이완용의 앞에 멈춰 섰습니다. 발굽 소리가 멈추었고 이완용이 인력거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순간, 이재명이 난로를 걷어찼습니다. 타오르는 숯덩이가 눈밭을 구르며 붉은 궤적을 그렸습니다.




"이완용! 이 나라의 역적. 죽어라." 외침과 함께 단검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습니다. 이완용은 허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찔렸습니다. 이완용이 칼에 찔리기 전에 인력거꾼 박원문이 막아섰고, 이재명은 반사적으로 이를 방해꾼으로 인식, 가로막던 박원문을 찌르고 다시 이완용을 공격했습니다.(인력거를 몰던 박원문은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한이 탑승객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칼에 찔린 박원문은 사망하였고, 이재명에게 살인죄가 적용되었습니다)




이완용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칼을 맞고 비틀거렸습니다.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들었고,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스며들었습니다. 순간 광장이 술렁이며 주변의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이재명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오늘 우리의 공적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확신, 자부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 경찰에게 넓적다리가 찔리고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그는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총에 맞고 사망한 지 두 달 후의 일이고 그의 나이는 푸르디푸른 스물둘이었습니다.




이재명은 이완용이 현장에서 죽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허리와 어깨 등을 찔려서 폐가 뚫리는 큰 중상을 입게 됩니다. 부상당한 이완용은 대한의원(의정부 직속으로 운영된 국내 최고의 의료기관)에서 일본인 의사의 수술과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로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1호였습니다.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일본인 의사가 말하기를 "외과 의술의 발전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 날 죽었다."고 했습니다.

회복한 이완용은 더욱더 매국행위에 전념합니다.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불법적인 회의를 거쳐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이 강제적으로 맺어집니다.




회색 벽이 둘러싼 조사실. 탁자 위엔 희미한 전등이 어른거리고, 방 안에는 습기와 피비린내가 섞인 공기가 가라앉아 있습니다.이재명 의사의 두 손은 거칠게 묶여 있습니다. 손목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옷자락은 이미 찢어지고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습니다.

“공범이 있느냐?”

일본 경찰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습니다. 책상을 내리치며 다그쳤지만, 이재명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큰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단했습니다. 방 안에 퍼진 말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울려 퍼졌습니다. 일본 경찰의 눈썹이 꿈틀거렸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고통에 찬 몸을 똑바로 세우며 이어 말했습니다.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

일순간, 방 안이 얼어붙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얼굴이 경멸과 당혹감으로 일그러졌습니다. 그들은 협박하고, 회유하며 그의 입을 열게 하려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이, 그가 흘린 피가, 그의 결코 꺾이지 않는 눈빛이, 차디찬 조사실을 넘어 조국의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곧 경성공소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고등법원(오늘날의 대법원)에서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교수형이 확정됩니다. 그리고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긴 지 1개월 만인 1910년 9월 30일, 결국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했습니다.

1910년 9월 30일은 조선총독부 체제 발족 바로 전날입니다.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일제의 첫번 째 사형수였습니다.




비록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 때문에 17년간 폐렴을 고질병으로 달고 다니며 고생하다가 결국 1926년에 그로 인해 죽었습니다. 어찌 보면 17년에 걸친 암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10년 가을, 이재명의 시신이 놓인 암담한 감옥의 한구석. 김구는 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서 있었습니다. 이재명의 몸은 교수형의 흔적이 선명했고, 그의 얼굴에는 고통보다도 오히려 미완의 결의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김구는 주머니에서 녹슨 권총을 꺼내 천천히 이재명의 가슴 위에 놓았습니다. 그 권총은 원래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기 위해 준비했던 무기였습니다.

"이걸 네게 주었어야 했는데…" 김구의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내가 그땐… 네 손에 권총을 쥐여주지 못한 게 한이로다. 칼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네 목숨만 앗아갔지…용서하게… 부디 용서하게…."

그러나 대답은 없었습니다. 감방에는 바람 한 점 없는 적막만이 가득했습니다. 김구는 눈을 감았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찔렀습니다. 그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의거 전에 김구 선생을 찾아가 준비한 권총과 단검을 꺼내 이완용을 척살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김구와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노백린은 이재명을 헛된 열정에 들뜬 젊은이로 보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말렸습니다.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던 이재명, 목숨을 바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라 차마 사지로 보낼 수 없었던 김구와 노백린은 이재명의 권총과 단검을 빼앗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두사람의 만류에도 막을 수 없었던 이재명의 애국심. 총을 허락했었다면 이재명은 죽지않았을 것이라 생각되어 김구는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백범일지에서 밝혔습니다.




이재명 의사는 1887년 10월 16일 평안도 선천군(現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노동 이민을 갔으나 1, 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에 힘 쏟기 위해 1907년 귀국하였습니다.

1909년 1월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부를 방문하기로 하였을 때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토 히로부미는 같은 해인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저격당해 죽었습니다.



이재명 의사.jpg 이재명 의사



1909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죽자 이완용, 일진회 회장 이용구, 정미칠적 송병준을 처단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완용은 이재명, 이용구는 김정익,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이재명은 신문을 보고 이 정보를 입수한 뒤 밖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11시 30분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을 피습하였으나 암살에는 실패하였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졌습니다.



이지명의사의거터.jpg 명동성당 앞에 있는 의거비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식민주의는 피지배층을 참혹하고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베를린회담 때에 콩고 분지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로 인정되었다는 점입니다. 레오폴드는 자신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해 이 지역의 천연자원인 고무를 착취했습니다. 이 시절에는 세계가 자동차 산업을 확장해 가던 시기라 이 지역에서 나는 고무에 대한 수요가 높았습니다.

레오폴드는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족 남성들에게 고무의 할당량을 채우도록 요구했습니다. 부족 남성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서 말이죠. 만약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인질들의 손목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때 당시 수백만 명의 콩고인의 손목이 잘려 나가는 극악무도한 짓을 했습니다. 히틀러에게 뒤지지 않는 악마 같은 놈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완용이 추도했나 봅니다. 유유상종 내지는 동질감을 느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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