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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또다시 개혁이 필요한 교회





큰아버지는 많은 유산을 물려받으셨지만 평생 한량으로 사셨습니다. 평생 집안을 안 돌보셨기에 슬하의 자식들이 많이 고생했습니다. 각자의 인생을 각자가 알아서 챙겨야 했기에 사촌들이 많이 고생했습니다. 사촌 누나 둘과 사촌 형은 돌아가면서 작은집인 우리 집에 와서 자랐습니다. 사촌 누나가 우리 집에서 지내다 독립해 나가면 그다음은 사촌 형이 와서 지내는 형태였습니다. 어린 시절 같이 자랐기에 저희 형제와 사촌들은 사이가 참 좋습니다. 그런 연유로 사촌들은 저희 어머니를 친어머니 대하듯이 합니다.




언젠가 사촌 형과 술자리에서 사후세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촌 형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한번 죽으면 끝이지 무슨 사후세계가 있느냐고 그랬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저는 귀신을 안 무서워했습니다. 오히려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후세계가 있다는 증거일 테니 귀신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도 존재의 소멸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소멸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촌 형이 사후 세계를 부정하는 이유가 살면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가보다 그렇게 이해했었습니다.




그 얘기를 저희 어머니에게 했더니 저희 어머니도 한번 죽으면 끝이지 끔찍하게 또 다른 생을 사냐고 그러시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는 참고로 세례까지 받은 가톨릭 신자입니다. 완전 뽀로꾸 신자죠. 물론 어머니가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닐지라도 종교를 갖고 계신다는 것은 좋은 일일 겁니다. 종교를 통해서 위안과 위로를 받는다는 것과 바르고 선하게 살아가게 하는 올바른 도덕성을 갖게 해주는 것이 종교가 갖고 있는 순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사촌 형과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려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삶이 무한히 반복한다는 말인데. 니체의 말이 과연 옳은 걸까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간추려보면, 보통 세 가지가 됩니다.




첫 번째가 기독교에서는 영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하게 살았나 악하게 살았나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하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선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번뇌와 업을 끊었기 때문이죠.

세 번째가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무(無).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거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에 하나를 덧붙이면 그게 바로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인생이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의 인물들은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모르는데,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인생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니체보다는 쿤데라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성당에 다니시는데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안 믿는 건 아닙니다. 10대 20대 때부터 저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설명은 너무 과학적이지가 않았습니다. 좀 더 세상을 경험해 본 후 이성이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종교가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도 종교가 없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젊은 것 같습니다.^^




이성, 합리, 과학, 젊은 사유 이런 것들 말고도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지금 세상의 종교들은 너무 부패한 것 같습니다. 신을 팔아서 부를 축적하는 장사꾼 같은 종교인들이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불교도 그렇고 대부분의 종교가 다 해당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6세기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교회가, 종교가 너무 부패해 있었습니다. 돈으로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을 면하게 해준다는 면죄부를 팔았던 것이 용납될 수 없는 교회의 대표적인 부패였습니다.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이나 성서 지상주의, 칼뱅의 예정설, 직업소명설 등의 종교개혁 시도가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져 신교, 프로테스탄트 교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몇백 년이 지나니 중세의 유럽교회처럼 신교도 이제는 똑같이 부패해졌습니다. 깨끗할 줄 알았던 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밖에도 종교 간의 분쟁과 그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 학살, 테러리즘 등도 여전히 종교가 갖고 있는 악기능입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종교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이 가져온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사람들의 읽고 쓰는 능력이 엄청나게 도약했습니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비율인 문해율이 높아졌습니다.

그 시작은 1517년 만성절 직후에 비텐베르크라는 독일의 작은 자치도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사이자 교수인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 논제를 발표해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 관행에 대한 학문적 논쟁을 호소했습니다. 이는 바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는 개인이 하느님,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개념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 개개인 모두 성스러운 문서인 성경을 혼자 힘으로 읽고 해석해야 했습니다. 전문가나 사제, 교회 같은 제도적 기관의 권위에 의존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오직 성경만을 진리로 여기는 이 원리는 누구나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루터는 문해력과 학교 교육의 책임을 다할 것을 부모와 통치자들에게 촉구했습니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과 더불어 사람들의 문해력이 높아지고 학교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 때문에 문해력과 교육 수준이 높아진 건지, 아니면 문해력과 교육 때문에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느 쪽이 옳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프로테스탄티즘과 문해력 모두 경제성장과 대의민주주의, 인쇄기 같은 기술 발전의 영향으로 확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독일과 이웃 지역으로 밀려왔을 때, 프로테스탄티즘이 형성해 놓은 글을 읽을 줄 아는 농민들과 지방의 학교들은 교육받은 준비된 노동력을 제공했고, 이 노동력은 급속한 경제발전과 2차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국민을 교육시키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사고를 장려하여 의도치 않게 국가의 예산으로 이루어지는 보통 교육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여성 문해력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문해력이 중요한 이유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어머니들은 문맹인 어머니들보다 아이들을 더 적게 낳아 더 건강하고 똑똑하고 부유하게 키우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해력 향상과 학교 교육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할 순 없지만, 창문에 깃발처럼 휘날리는 거대 교회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 천지인 밤하늘을 보면 500년 전 루터가 성당 문에 못 박은 95개 조항이, 지금 이 땅의 교회 문에 새겨져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한국 개신교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전광훈 목사를 보면서는 불편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신앙을 정치적인 도구로 삼고, 교회를 권력의 장으로 만들며, 신도들에게 극단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모습은 그가 따르는 신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종교는 본래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현실에서 종교 지도자는 분열을 조장하고 혐오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헌금으로 충당한 2,100억 원짜리 교회를 보았을 때도 그 감정은 더욱 깊어집니다. 신앙을 '공간의 크기'로 치환하는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돈이 정말 신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인간의 욕망이 만든 거대한 탑이었을까요? 신도들은 자신의 생활을 쪼개어 헌금했을 텐데, 그렇게 모인 돈으로 화려한 건물을 세우는 것이 과연 신앙적인 행위일까요?

예수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며 분노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의 이름을 빙자한 장사꾼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담임목사직이 세습되는 현실입니다. 담임목사직이 아들에게 승계되는 장면은 마치 중세 왕조의 혈통 계승을 연상시킵니다. 목회란 '소명'이 아니라 '세습직'이 되어버린 현실.

신학교는 영적 성찰의 공간이 아닌 '가업 승계를 위한 학위 공장'으로 전락했고, 성직자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목사님 아들'이라는 호칭에 갇혔습니다. 신의 부름이 아니라 혈연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결정된다는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개신교는 본래 종교개혁을 통해 부패한 성직 제도를 타파하고자 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신앙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가문 사업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합니다.




이제는 개신교에도 다시 한번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가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마르틴 루터가 부패한 교회를 향해 95개 조 반박문을 붙였듯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도 새로운 개혁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신앙은 개인을 위한 것이고, 그 본질은 사랑과 겸손, 그리고 정의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신앙이 권력과 결탁하고, 돈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종교가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더 이상 거대한 건물이나 세습되는 권력의 중심지가 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진정한 위로와 도덕성을 주는 순수한 형태로 남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개신교가 다시 태어나야 할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교회당이 아닌 마음에 십자가를 세워야 합니다.




조지프 헨릭의 <위어드>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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